수경선생(사마휘)에게 관운장이 곁에 있다가 한마디 합니다. "관중과 악의는 춘추전국시대의 유명한 인물로 그 공과 업적이 천하를 덮을 만한데, 공명이 자신을 그 두 사람에게 견주는 것은 지나치지 않은지요?" 사마휘는 도리어 웃습니다. "지나친 게 아니라 오히려 부족하다 생각되오. 나는 그 두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견주는 게 나을 성싶은데.." 

"다른 사람이라면 누구 말씀이십니까?" 관운장이 되묻자 사마휘가 대답합니다. “주나라 8백년을 일으킨 강자아(姜子牙)와 한나라 4백년을 일으킨 장자방(張子房) 말이오." 사마휘의 말을 듣고 있던 모든 사람들은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사마휘가 섬돌을 내려와 하직 인사를 나누고 떠나려 하자 유비현덕이 만류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습니다. 문을 나서던 사마휘는 문득 하늘을 우러러 보며 큰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와룡이 비록 주인을 얻었으나 애석하게도 아직 때는 얻지 못하였구나!"

이튿날 유현덕은 관우와 장비와 함께 수하 몇몇을 거느리고 융중으로 떠났습니다. 유비 일행이 와룡강앞에 있는 제갈량의초려(草廬)에 도착했으나, 제갈량은 출타하고 없었습니다. 심부름하는 동자(童子)에게 제갈량이 어디 갔는지, 언제 오는지 물었으나, 동자는 제갈량의 나들이가 일정치 않아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유비 일행은 다음에는 소식을 보내 알아본 후에 오기로 하고 그냥 돌아갔습니다. 물론 장비는 투덜댔습니다. 이것이 1차 방문이였습니다.



제갈량이 집에 와 있다는 소
식을 들은 유비 일행은 두 번째로 제갈량을 찾아 갔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한겨울이어서 몹시 추운 날이었습니다. 거기

다가 눈까지 내렸습니다. 장비는 여전히 사람을 시켜서 불러오면 되지, 그까짓 촌부를 뭐 하러 직접 찾아가느냐고 불평했습니다. 와룡선생의 초려에 도착했으나 와룡은 출타하고 없고 그의 아우가 제갈균이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제갈균에게 와룡이 어디 있는지 물었으나 행적이 일정치가 않기 때문에 모른다는 대답뿐이었습니다. 유비는 서찰을 남겨두고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2차 방문이였습니다.

봄이 되어 유비는 길일을 택해 목욕재계하고 와룡을 찾아갈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자 장비는 물론이고 평소 말이 없던 관운장까지 말리고 나섰습니다. “형님은 몸소 두 번씩이나 찾아가셨습니다. 예의가 지나칠 정도입니다. 생각건대 제갈량은 허명만 높을 뿐 실제로는 별로 배운 것이 없는 사람일지도 모르며, 그래서 번번이 피하고 형님을 만나려 하지 않는 듯합니다. 어째서 형님은 그런 사람에게 혹하셨습니까?" 장비는 한술 더 떠서, "사람을 보내서 불러들이고, 만일 안 오면 자기가 가서 오랏줄로 묶어서 끌고 오겠다'고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유비는 두 아우를 꾸짖고 와룡을 만나려 길을 떠났습니다.

마침 와룡은 집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관우와
장비는 밖에 서 기다리도록 하고 유비만 안으로 들어가 섬돌 아래서 기다렸는데, 반나절이 지나도 공명은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장비가 안으로 들어와 그 모습을 보고 화가 치밀어 '불을 싸질러 버리겠다'고 했습니다. 유비가 관운장에게 장비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도록 하고 계속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한 시각을 더 기다리고 서 있었습니다. 

그러자 공명이 잠에서 깨어 일어났습니다. 공명은 일어나 유비와 예를 표하고, 드디어 천하삼분지계를 이야기 합니다. 공명은 유비에게 "북쪽은 천시(天時)를 얻은 조조에게 양보하고, 남쪽은 지리(地利)를 손에 넣은 손권에게 양보한 다음, 인화(人和)를 얻어 먼저 형주(荊州)를 손에 넣어 근거로 삼고 나서 바로 서천(西川)을 취해 기반을 세우고, 조조·손권과 더불어 정족지세(鼎足之勢)를 이루라고 말하면서, "그런 다음에야 중원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3차 방문이였습니다.



유비
(161-223)는 한나라 황손이고 제갈량(181-234)은 한낮 백면서생(白面書生)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유비는 제갈량보다 나이가 20세나 많았습니다. 또 유비는 당시 관운장, 장비, 조자룡 등 범 같은 장수들을 거느리고 천하의 주인이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유비가 제갈량을 얻기 위해 삼고초려를 한 시기는 207년, 그러니까 유비의 나이 46세, 제갈량의 나이 26세 때입니다.

신분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유비가 제갈량에게 굽실거려야 할 처지가 아닙니다. 만일 유비가 자존심 때문에 삼고초려를 하지 않아 제갈량을 얻지 못했다면 유비라는 인물은 역사에 자취를 남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대망을 가진 사람은 작은 자존심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법이다. 한나라의 개국공신인 한신이 그랬고, 유비가 그랬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 애터미문화의 정립과 창달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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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UNHANBU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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