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부자의 좋은 책과글 2017. 10. 18. 16:19

아리랑은 한국의 대표적인 민요입니다. 아리랑은 한국인의 혼이요 정신이요 정체성입니다. 우리 민요 아리랑은 음악의 차원을 넘어 한국인의 존재가치를 확인하는 숭고한 문화 유산입니다. 현재에도 아리랑은 여러 노래 중 하나의 노래가 아닌 애국가 차원의 노래입니다.

스포츠 경기에서 남북 단일팀을 이루거나 할 때 남북한의 국가(國歌)
대신 예외 없이 선택되는 단가(團歌)는 아리랑입니다. 체제와 이념을 넘어
공통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노래가 아리랑인 것입니다. 이 아리랑이 2012년 12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됨에 따라 전 인류의 음악이 되었습니다. 우리 민요 아리랑은 아리랑 또는 이와 유사한 음성이 후렴에 들어 가는 민요의 총칭으로 정의 되며, 남북을 통틀어 약 60여종 수천여수(2014년 7월에 발간된 자료에 따르면 정선아리랑만 5503수) 이른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평안도에 서도아리랑, 강원도에 강원도아리랑, 정선아리랑, 뗏목아리랑, 함경도에 함경도아리랑, 단천아리랑, 아리랑타령, 황해도에 해주아리랑, 경기도에 경기아리랑, 긴아리랑, 경상도에 밀양아리랑, 문경 아리랑, 전라도에 진도아리랑 등이 대표성을 띤 아리랑이고 그 밖에 지역마다 각기 다른 아리랑이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나라 밖으로도 우리민족이 사는 중국 땅에 독립군아리랑,연변아리랑, 러시아 땅에 사할린아리랑 등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일반적으로 부르는
아리랑은 경기 아리랑 또는 신아리랑 또는 본조(本調) 아리랑으로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에 삽입된 주제가입니다. 그러니까 19세기 말-20세기 초에 만들어 진 것입니다.


아리랑의 어원(語源)는 아리랑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각 지방마다 전설이 있습니다. 몇 가지 대표적 인 것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하기 위해 부역꾼들을 징집할 때 부역꾼들이 "나는 님과 이별한다"는 뜻으로 아리랑(我離嫏)을 불렀다는 설이 있고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하기 위한 원납전(願納錢) 발행으로 원성이 자자하여 "차라리 내귀가 멀었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아이농(我耳聾)이라 한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 밀양아리랑이 생겨나게 된 전설의 주인공 아랑(阿娘)을 애도한 노래 "아랑가"에서 유래했다는 설,  신라시조 박혁거세 의 아내 알영부인(閼英婦人)을 찬미한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 조선의 창업에 반대하는 고려의 신하 일곱 명이 송도나 정선으로 들어와 그들의 심정을 한시로 지어 율창(律唱)으로 부른데서 비롯 되었다고 보는 설 등이 있습니다. 이밖에도 지방마다 독특한 설이나 전설이 있습니다. 수필가 유오영(尹五榮, 1907-1976)은 그의 수필 <민요 아리랑>에서 이상의 잡다한 어원설은 건강부회(牽恒附會)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억지로 끌어 붙여 자기에게 유리하게 함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하고, 아리랑의 '아리'는'길다(長)'의 뜻을 지니고 랑은 '령(嶺)'의 변음이므로 '아리랑'은 곧 긴 고개라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장(長)의 고어가 '아리'인 것이 분명하다는 설명과 함께, 아리수(阿利水) 역시 곧 장강(長江)을 뜻하는 것으로 그 시대 그 지역에서 가장 큰 강 을 지칭하는 이름이므로, 아리랑 역시 지역마다 있는 가장 큰 고개를 부르는 이름이었음을 밝혔습니다. 덧붙여 '쓰리랑'은 '시리 시리 시리랑에서 온 것으로 이는 '사리 사리, 혹은 서리 서리'의 변음이며, 지방마다 높은 재를 사실 고개', '서슬고개'로 부르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꾸불꾸불 서린 고갯길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한편 아리수는 고구려에서 지금의 한강을 부르는 말로 광개토왕비에 새겨진 이름입니다. 서울시에 서는 2004년 2월부터 서울시 수돗물의 이름 아리수라 명명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2005년 3월등록하고, 2008년 5월 29일 상표등록을 출원하였습니다.

호머 B. 혈비트(Homer B. Hulbert, 1863-1949)는 미국인으로 감리교 선교사이자 구한말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이었던 육영공원(育英公院)의
교사로 근무하며 영어를 가르쳤던 교육자로 한국의 독립과 항일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던 인물입니다. 그의 한국어 이름은 헐벗, 흘법, 할보였습니다. 그는 고종황제의 최측근 보필 역할 및 자문 역할을 하면서 미국 등서방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창구 역할을 하였습니다. 고종황제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은 외국인이었으며,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지원하였습니다. 1907년 헤이그밀사 파견을 적극 지원하였으며 3.1운동을 지지하였습니다. 그는 자비로 한글 개인교사를 고용하여 3년 반에 한글로 책을 저술할 정도의 한국어 실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1889년 최초의 순 한글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저술해 육영공원의 교재로 사용하였습니다. 육영공원에 근무하면서 그는 외국서적의 번역및 외국에 대한 한국 홍보활동을 벌여 많은 서적과 기사를 번역·저술했습니다. 그와 그 부인은 국내외에서 조선을 위해 평생 일했습니다. 1949년 8월 병사하여 외국인으로는 최초로 사회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하였으며 양화진(楊花津) 외국인 묘역에 안장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0년 3월 1일 그에게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그는 오늘날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 1위에 꼽히고 있습니다. 호머 헐버트는 1896년 그때까지 구전
(口傳)으로만 전해오던 아리랑을 최초로 서양악보를 사용해 채록(採錄)하였습니다. 헐버트가 채록했던 악보의 가사에는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이 노래가 기록돼 있는 <조선유기 (朝鮮留記)>라는 잡지 의 <한국의 소리음악>(Korean Vocal Music)이라는 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아리랑은 한국인에게는 쌀과 같은 존재입니다. 다른 노래들은 말하자면 반찬에 불과합니다. 이노래는 어딜 가도 들을 수 있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이 곡은 3520일 전인 1883년부터 유행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노래는 즉흥곡의 명수인 한국인들이 끝없이 바꿔 부를 수 있도록 만들어졌지만 후렴구는 바꾸지 않고 부릅니다. "문경새재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한양과 영남을 잇는 길로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장원급제를 바라며 과거보러가는 선비, 일확천금을 꿈꾸는 보부상 등 많은 사람들이 넘었던 긴 고개이며,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수많은 부역꾼들이 사랑하는 처자식을 고향에 두고 넘어야 했던 고개 이기도 합니다. 이런 긴 고개가 바로 아리랑 고개인 것입니다. 힘없는 민초들이 애환을 품은 채 넘어야 했던 긴 고개는 어느 고을에나 있습니다. 따라서 아리랑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지 않았을까요? 대중가요 <울고 넘는 박달재>에도 그런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 도 못가서 발병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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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UNHANBU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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