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부자의 성경공부'에 해당되는 글 128건

  1. 2017.10.27 :: 위기 때 인물이 나온다
  2. 2017.10.26 :: 다툼을 극복하는 길
  3. 2017.10.19 :: 지도자에게 필요한것 3가지
  4. 2017.10.18 :: 사랑이란
  5. 2017.10.18 :: 죄는 항상 가격표가 있다
  6. 2017.10.17 :: 새로운 패러다임
  7. 2017.10.17 :: 지혜로운 인간관계
  8. 2017.10.16 :: 복된 성품
  9. 2017.10.15 :: 질투를 극복하는 방법
  10. 2017.10.13 :: 지도자에게 필요한 덕목
선한부자의 성경공부 2017. 10. 27. 10:19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등장한 사람은 모두 14명이다. 그중에 사사로 인정되는 사람은 12명이다. 드보라와 함께 활동한 지도자인 바락과 스스로 왕이 되어 3년간 세겜을 다스린 아비멜렉은 사사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그들을 사사로 포함시키기도 한다. 각 사사의 중요한 사적은 이렇다첫째 사사는 옷니엘이다. 그는 구산 왕 리사다임에게 8년간 압제를 당하던 이스라엘을 구한 최초의 사사다. 둘째 사사는 에훗이다. 그는 이스라엘을 모압 왕 에글론으로부터 구한 왼손잡이 사사로서 80년이란 가장 오랜 세월 동안의 평화시대 구축에 공헌했다. 셋째 사사는 삼갈이다. 그는 아낫의 아들로 소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였다넷째 사사는 드보라다. 그녀는 유일한 여성 사사로서 바락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사사직을 수행하면서 가나안 왕 야빈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했다. 다섯째 사사는 기드온이다. 그는 미디안으로부터 7년간 압제를 당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했는데 용사 300명을 통해 미디안 대군을 물리쳤다. 여섯째와 일곱째 사사는 돌라와 야일인데 그들은 평화 시대에 사사 역할을 수행해서 자세한 기록이 없다여덟째 사사는 입다다. 그는 암몬 자손에게 18년간 압제 당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사로서 기생의 아들 출신으로 나중에 사사가 된 인생 역전 드라마의 주인공이다. 아홉째, 열째, 열한째 사사는 입산, 엘론, 압돈이다. 그들은 평화 시대에 사사 역할을 해서 그들의 사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성경에는 없다.열두째 사사는 삼손이다. 그는 포도주를 마시지 말고 머리를 깎지 말고 시체를 만지지 말아야 하는 거룩한 나실인 출신으로서 사사시대의 마지막 사사다. 다른 사사들의 활동은 국가적이고 군대를 동원한 활동이었지만 삼손의 활동은 개인의 힘에 의존한 개인적 활동이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사사들의 사적을 보면 대개 리더로서의 질은 약간 떨어지는 느낌을 준다. 에훗은 대적과의 결투에서 정정당당한 방법 대신 암살하는 방법을 취해 암살자 혹은 자객으로 묘사되어 있고(3:12-30), 사사는 아니었지만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를 잠자는 사이에 말뚝으로 박아 죽인 행위로 칭찬받았고(4:17-21), 입다는 형제들로부터 쫓겨나 돕 땅에 거할 때 잡류(산적)의 두목으로 언급되었다.

그런 인간적인 결함은 삼손의 경우에서 절정에 달한다. 삼손은 방탕한 성격으로 나실인의 3대 규례를 어겼고 여러 이방 여자들과 육체관계를 맺는 정욕자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부족한 사람들을 사사로 세워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드러나게 했다. 그러므로 사사의 도덕적 결함을 보고 왜 그런 사람들을 선택하셨을까?”라고 의문을 던지기보다는 그들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과 섭리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믿는 사람의 가장 큰 복은 언제나 희망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고 예배와 기도 자리로 부르셨다는 것이 희망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모습이 아무리 부족해도 넘치는 희망을 가지고 전진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현재 모습을 보고 쓰시지 않고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가능성을 보고 쓰신다

기드온을 보라. 미디안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하는 소명을 이루도록 하나님이 처음 그에게 나타났을 때 그는 전혀 용사 같지 않고 미디안의 눈을 피해 숨어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다. 그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말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6:12).” 어떻게 대적이 두려워서 숨어 지내는 사람이 큰 용사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미래의 삶을 기초로 그를 용사로 보셨기 때문이다. 그처럼 하나님은 미래를 근거로 부르시고 사용하시기에 어떤 고통스런 현실 속에서도 낙심하지 말라하나님은 자식도 없는 노인을 불러 열국의 아비란 뜻을 가진 아브라함이란 이름을 주시고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다. 또한 사기꾼 같은 야곱을 불러 하나님을 이긴 자란 뜻을 가진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주시고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로 삼았다. 예수님은 갈대와 같은 시몬에게 반석이란 뜻을 가진 베드로란 이름을 주시고 그를 교회의 반석과 같은 존재로 삼았다. 하나님은 우리도 그렇게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그런 자기 가능성에 눈을 뜨라.


성경에는 소 사사 3명에 대한 짤막한 기록이 나온다. 입다가 사사가 된지 육 년 만에 죽고 길르앗의 자기 성읍에 장사되었다(7). 그 뒤를 이어 베들레헴 출신의 입산이 사사가 되었다(8). 베들레헴은 유다 지파의 베들레헴과 스불론 지파의 베들레헴이 있었는데(19:15) 유다 지파의 베들레헴은 유다 베들레헴(17:7,9) 혹은 베들레헴 에브라다(5:2)라고 불렸다. 당시 이스라엘 사사 대부분은 북부 지파의 출신이었기에 10절의 베들레헴은 스불론 지파의 베들레헴으로 추정된다입산에게는 아들 삼십 명과 딸 삼십 명이 있었는데 그것은 입산의 부와 권세를 잘 보여준다. 입산은 딸들을 다른 지파로 시집을 보냈고 다른 지파에서 여자 삼십 명을 데려와 며느리로 삼았다. 각 지파간의 유대 관계를 강화시키려고 자신의 아들과 딸을 다른 지파 사람들의 자녀들과 정략적으로 결혼시켰던 것으로 추정된다입산이 사사가 된 지 칠 년 만에 죽고 베들레헴에 장사되었다(10). 그 뒤를 이어 스불론 사람 엘론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11). 엘론 사사에 대한 기록은 사사기에서 가장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다엘론이 죽고 스불론 땅 아얄론에 장사되었다(12). 엘론과 아얄론이 같은 어원을 가진 것으로 볼 때 아마 아얄론은 엘론이 건축한 성읍일 가능성이 크다. 엘론 뒤를 이어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다(13). 압돈은 입산이나 엘론과 달리 힐렐(Hillel)의 아들로 기록됨으로 유력한 가문 출신이었음을 암시한다압돈이 사사로서 누린 부와 권세는 입산처럼 아들 사십 명과 손자 삼십 명, 그리고 어린 나귀 칠십 마리를 탔다는 내용을 통해 잘 암시되어 있다(14). 압돈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팔 년 만에 죽고 에브라임 땅 아말렉 사람의 산지 비라돈에 장사되었다(15). 입다 이후의 사사들인 입산, 엘론, 압돈의 사적이 별로 기록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당시가 평화시대로서 대적과 시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개 보면 위기 때 인물이 나온다.

위기는 기회가 되지만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위기가 기회가 되려면 전제가 필요하다. 그것은 위기 때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그 뜻을 따라 힘써 순종해서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진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전제다. 즉 위기가 닥치면 열매를 찾으려는 생각을 줄이고 뿌리를 살피려고 해야 한다. 그렇게 뿌리를 살필 줄 아는 심령에게 위기는 기회가 되고 문제는 인물을 만들어내는 발판이 된다

어느 날, 미국 뉴저지에 사는 한 사람이 자기 집 정원에 민들레가 너무 나서 그 문제로 고심하다가 농무성으로 편지를 썼다. “관계자 분들에게! 저희 동네에 민들레가 많이 나서 민들레 뽑는 일이 너무 힘든데 대책을 세워주세요.” 농무성에서 짤막한 답장이 왔다. “저희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민들레를 뽑으려고만 하지 말고 사랑해보세요. ”살다 보면 사랑하는 가정과 일터에 원하지 않는 민들레가 많이 날 수 있다. 그러면 가끔 하나님께 하소연을 한다. “하나님! 그 문제 때문에 너무 힘든데 무슨 좋은 대책이 없나요?” 그때 하나님은 이런 응답을 주실 것이다. “아무개야! 문제를 너무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문제를 껴안고 전진해 보라. ”왜 하나님이 문제를 남겨두셨는가? 사랑하는 자녀를 강하고 성숙하게 만들려는 하나님의 뜻이다. 시험은 영혼을 강하고 성숙하게 만들기 위한 도구로서 누구도 면제되지 않는다

시험이 없는 것은 축복이 아니다. 시험이 없으면 준비도 없고, 발전도 없고, 승리도 없다. 시험이 실력 향상에 필수적이듯이 문제는 영력 향상에 필수적이다사람들은 끊임없는 문제 가운데 살아간다. 그러면 때로 문제가 없는 곳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 말은 결국 내게 아무 발전이 없어도 좋다.”는 말과 똑같은 말이다. 문제는 작품 인생을 위해 꼭 있어야 한다. 큰 위기가 있을 때 큰 인물도 나온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시험과 문제를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그것들을 껴안고 전진함으로 인물의 길로 들어서는 복된 심령들이 되라

- 이한규목사님 사사기강해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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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UNHANBU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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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부자의 성경공부 2017. 10. 26. 15:26

어느 공동체나 다툼은 있습니다. 사랑하는 부부 사이에도 다툼은 있습니다. 그런 다툼 때문에 너무 충격받지 마십시요. 지나온 길이 다르면 물줄기가 차이 나는 것은 당연하고 북한강과 남한강이 마주치는 곳에 소용돌이가 생기는 것도 당연합니다. 당연한 것을 가지고 충격받는 것이 더 이상한 일입니다. 소용돌이가 생기면 그때는 숨이 막힐 것 같지만 그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몇 백 미터만 더 내려가 보면 물줄기가 넓어진 상태에서 다시 평온을 찾습니다.

부부관계, 친구관계, 교우관계 등은 마치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관계와 같아서 다툼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때 너무 충격받지 마십시요. 내가 상대에게 반대할 수 있는 것처럼 상대도 내게 반대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십시요. 중요한 것은 다툼을 통해 필요한 교훈을 얻고 다툼을 극복해서 창조적인 열매를 내놓는 것입니다. 그처럼 다툼을 극복하고 창조적인 열매를 내놓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이한규목사님의 사사기강해 말씀에서 교훈을 얻어 보겠습니다.


1. 반대에 속상해하지 말라

이스라엘이 기드온의 300 용사를 통해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대승하고 기뻐할 때 그런 기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생겼습니다.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찾아와서 시비를 건 것입니다. 그들은 기드온에게 말했습니다(1). “왜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 우리를 부르지 않았는가? 우리를 이처럼 대접하는가?” 

시기심과 질투심 때문에 좋은 분위기가 망쳐지면 속이 상하지만 그것도 인간 사회에 있는 당연한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너무 충격받지 말고 너무 속상해하지 마십시요. 살다보면 어디서나 반대자들은 있습니다. 광야 시절 출애굽을 이끈 영웅적인 리더 모세에게도 수시로 반대자들이 생겼습니다. 사도 바울도 가는 곳마다 반대자들을 만났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반대자들을 극복하고 위대한 일을 이뤄내는 것입니다.

요즘 정치를 보면 여야가 사사건건 반대하면서 진리 문제가 아닌 정책 문제로 항상 갈 데까지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처럼 아무리 좋은 일에도 사사건건 태클을 거는 반대자가 있음을 인지하고 반대자를 만날 때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요. 또한 그 반대 때문에 충격받아서 선한 일을 포기하지 마십시요. 해야 할 일이라면 누가 반대하든지 상관하지 말고 계속 하십시요.

2. 영광의 자리에서 내려오라 

왜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승리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을까요? 요셉 후손인 자기들이 다른 지파 사람들보다 낫다는 우월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빠진 지파는 에브라임 지파 외에 다른 지파들도 여러 지파가 있었습니다. 오히려 에브라임 지파는 전쟁 말기에라도 참전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지파들은 가만히 있는데 그들만 찾아와 불평한 것은 그들의 우월의식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우월의식 때문에 에브라임 지파는 이스라엘의 12지파 중 가장 불평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여호수아 때도 자기들이 기업으로 받은 땅이 다른 지파에 비해 좁다고 자기 지파 출신 리더인 여호수아에게 불평했었습니다. 사사기 12장에서는 사사 입다 때도 본문과 비슷한 불만을 토로해서 입다를 분노하게 했습니다. 또한 나중에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될 때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여로보암도 바로 에브라임 사람이었습니다.

그 문제를 어떻게 기드온이 푸는가를 보겠습니다. 성경을 보면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 행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수확 후 남은 포도 찌꺼기인 끝물 포도는 처음에 수확한 포도인 맏물 포도보다 맛도 시고 품질도 훨씬 떨어진다. 결국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다고 한 것은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한 기드온 가문의 아비에셀보다 전쟁 막바지에 참여한 에브라임 지파의 공로가 더 컸다고 높여준 표현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주셨으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미디안 군이 기드온 군대에게 쫓겨 도망갈 때 요단 나루터에서 길목을 지키던 에브라임 사람들이 미디안의 두 리더 오렙과 스엡을 죽였습니다. 그 공로를 칭송하면서 너희가 큰일을 했고 내가 한 일은 하찮은 것이었다.”고 하자 비로소 에브라임 사람들의 분노가 풀렸습니다. 다툼이 생기면 영광과 권세의 자리에서 과감히 내려오고 상대를 높여줌으로 그 다툼을 극복하십시요. 

3.


자존심보다 자부심을 키우라

에브라임 지파가 시비를 걸어온 것은 결국 자존심 문제가 컸습니다. 그처럼 사람들은 자존심상하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부심(自負心)’이 큰 것은 좋지만 자존심(自尊心)’이 큰 것은 좋지 않습니다. 자존심만 크면 자존심이 상하는 상황을 못 참고 판단력을 잃고 결국 망하는 길로 가게 됩니다. 반면에 자부심이 크면 어떤 어려움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강한 뚝심이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그런 자부심을 키우십시요.

옛날에 강기슭에 한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 나무는 옆에 있는 갈대를 늘 비웃었습니다. “이 바보 갈대야! 너는 허깨비 바람 앞에서도 그렇게 굽실거리느냐? 나처럼 꼿꼿해 봐라!” 그러던 어느 날 큰 태풍이 불었습니다. 그때 그 교만한 나무는 뿌리째 뽑혔지만 갈대는 태풍 속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누가 강한 사람인가? 자부심을 가지고 온유와 겸손을 잃지 않는 사람이 진짜 강한 사람입니다. 자존심만 강하면 결국 망하게 됩니다.

본문에서는 좋게 끝났지만 사사기 12장에서는 전혀 다른 결과가 펼쳐졌습니다. 그때 입다가 암몬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자 에브라임 지파가 와서 본문처럼 시비를 걸었습니다. “왜 전쟁에 나갈 때 우리를 부르지 않았나? 너와 네 집을 불살라버리겠다!” 그때 입다는 전쟁 때는 모른 척 하다가 전쟁에 이기자 이제 와서 시비냐?”고 진노하며 에브라임을 쳐서 그때 에브라임 사람 42천 명이 죽었습니다. 그런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 않도록 자존심을 낮추고 자부심을 키우면서 늘 온유와 겸손으로 다툼을 극복해내십시요.

4. 친구들과 더욱 함께 하라

살다보면 어떤 상황에서도 반대자가 있지만 그 상황에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뜻을 같이 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반대자가 아니라 친구들입니다. 그런 친구들 때문에 힘을 얻고 비전도 이뤄집니다. 그러므로 자기 앞에 반대자가 보일 때마다 자기 옆의 친구들을 보면서 그 상황을 극복해나가십시요.

자신이 바른 길로 가고 있다고 확신하면 반대자들만 생각하지 말고 숨은 친구(동지)들을 더 생각하라. 반대자가 있다고 사람 자체에 실망해서 친구들까지 외면하지 말고 어려울 때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친구들과 더욱 함께 있으려고 하라. 가끔 자기 곁에 어떤 친구들이 있는지 꼽아서 그 명단을 적어보라. 그때 적을 친구가 적다면 이렇게 반성의 고백을 하라. “내가 누군가의 친구가 잘 되어주지 못했구나!” 그런 고백을 바탕으로 열심히 누군가의 친구가 되어주면 거꾸로 좋은 평생 친구를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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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UNHANBU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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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부자의 성경공부 2017. 10. 19. 22:35

사울이 죽은 후, 이스라엘은 둘로 갈라집니다. 하나는 다윗 편이고 또 하나는 사울의 아들인 이스보셋 편입니다. 그때 다윗은 점차 강성하게 되고, 이스보셋은 점차 약하게 되었습니다. 그 대세를 읽고 이스보셋의 군대장관인 아브넬이 다윗에게 나라를 넘기려고 다윗을 방문했다가 평소에 동생이 죽은 것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이 있던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의 손에 죽게 됩니다. 그때 성경에는 다윗이 아브넬을 추모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지금 한참 민심을 얻고 있던 다윗에게 아브넬의 죽음은 민심을 이탈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압이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고 자기 멋대로 아브넬을 죽였지만 다윗에게 화친의 사자로 왔다가 죽였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다윗이 사자를 죽였다는 심각한 오명을 뒤집어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요압과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통하라고 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가장 슬픈 일을 당했을 때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재 가운데 앉아 애통합니다. 그처럼 다윗은 아브넬을 위해 심히 애곡하라고 하고 본인은 아브넬의 상여를 따라갑니다.

그리고  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하고 그 무덤 앞에서 다윗이 소리를 내면서 우니까 백성들도 다 울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아브넬을 위해 애가까지 만들어 조시를 낭독하니까 백성들은 다시 그 추모의 노래를 듣고 또 울었습니다.

또한 석양이 질 무렵 백성들이 다윗에게 음식을 먹으라고 권하지만 다윗은 해 지기 적에 먹으면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이자 백성들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의 한 바가 아닌 줄을 아니라.” 그때야 비로소 백성들은 다윗이 요압을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다시 한번 아브넬의 죽음을 애도한 후,  다윗은 스루야의 아들들, 즉 요압과 아비새가 자기들이 개국 공신이라는 이유로 맘대로 날뛰는 것을 제어하기가 힘들다고 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행에 대해 친히 갚으실 것이라는 말씀을 합니다.  내용이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특별히 리더의 축복을 얻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  이한규 목사님의 사무엘서 강해를 통해 3가지 교훈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리더가 되려면 눈물이 필요합니다.

다윗은 거룩한 울보였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다윗은 아브넬의 무덤 앞에서 큰 소리로 웁니다. 아브넬을 위해 조시(弔詩)를 짓고 울먹이며 그 시를 낭독합니다. 다윗은 왕이었고, 무적의 용사였지만 감정도 풍부했고, 눈물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 사이에 점차 없어지는 것이 바로 지도자의 눈물입니다. 지도자뿐만 아니라 눈물이 없는 신앙이 아마 오늘날의 가장 큰 문제점입니다. 우리는 눈물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잃어버린 눈물을 되찾아야 합니다. 슬픔의 눈물은 우리의 상처를 치료해주는 강장제이고, 회개의 눈물은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만들어주는 비누와 같고, 기도의 눈물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지렛대이며, 헌신의 눈물은 인생의 기쁨과 보람과 행복감을 주는 원천이 될 것입니다.

눈물이 필요하다는 말은 우리에게 고난이 필요하다는 말도 됩니다. 사실 고난은 우리에게 큰 유익이 됩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올 때 인격이 다듬어 지고, 강인한 정신력이 살아나고, 삶에 대해 감사하고, 양심은 살아나고, 이웃에 눈을 뜨고, 신앙에 눈을 뜹니다. 그리고 결국 고난을 이기는 자가 결국 인생의 금메달을 걸게 됩니다.

사람은 환경이 좋아지면 영적으로, 육적으로, 병들고 타락하고 잠들게 됩니다. 우리 성도들 중에도 어떤 분은 어려움이 많지만 오히려 소망이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을 보면 집에 가시가 있고, 그 가시 때문에 괴로워하지만 결국 그 가시가 우리에게 진주를 만들어 내고 그 아픔이 좋은 신앙을 만들어냅니다.

가정도 어렵게 살 때는 아이들과 정도 많아지고, 하나가 잘 됩니다. 그래서 아이들도 한 방에서 잠자고, 한 상에 먹는 것이 정신건강에 더 좋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아이들이 방을 하나씩 달라할 때 주지 말라고 합니다. 아이들은 같이 섞여 살아야 정도 살아나고, 부모도 알고, 감사도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의 눈물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눈물을 아는 사람이 결국 최후에 웃는 자가 될 것입니다.



2. 리더가 되려면 지혜가 필요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 때문에 민심을 다 잃을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서로 심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야당 대표가 여당 대표가 주최하는 만찬에 참석해서 여당 경호실장에게 맞아 죽었다면 민심이 이반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심각한 상황이 될 수 있는 것을 알고 다윗은 아브넬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고, 울고, 조사까지 짓고, 금식까지 하는 것을 봅니다. 실질적으로 다윗이 아브넬의 죽음을 아쉬워한 측면도 있지만 백성들의 민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 지혜롭게 행동한 측면도 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의 민심을 잃지 않고 오히려 백성들이 다윗 왕을 더욱 기뻐하고 존경하는 왕으로 만드는 기회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그처럼 위기를 극복하는 삶의 지혜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마태복음 1016절 말씀을 보면 주님은 제자들에게 전도의 사명을 맡기면서 뱀 같이 지혜로우라!”고 했습니다. 뱀은 손도 없고 발도 없는 저주받은 동물입니다. 징그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뱀은 그 어려운 악조건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손도 없고, 발도 없고, 자본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고 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지혜가 있으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28-10절에 나오는 성령의 9가지 은사 중에서 제일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그것은 지혜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그 지혜가 어디에서 옵니까? 잠언 910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경외하는 삶에서 온다고 성경은 단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때 우리가 가장 자신을 잘 다스릴 수 있고, 가장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고, 가장 사업을 잘 할 수 있고, 가장 인간관계를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리더가 되려면 여백이 필요합니다.

다윗은 신하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왕이긴 하지만 약해서 스루야의 아들들의 행동을 통제하기가 어려우니까 하나님께서 그 행한 대로 갚아주실 것이다 라고 말하며 하나님께 모든 처리를 맡깁니다. 

사실 다윗이 왕으로서 요압과 아비새를 충분히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위적으로 제거하면 또 다른 요압과 아비새가 나타난다는 것이 바로 역사가 가르쳐주는 교훈입니다. 만약 그런 식으로 다 제거해 버리면 나중에는 왕 주위에 한 사람도 남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하나님의 치리의 손길을 기다리며 거침돌이 되는 사람이라도 가만히 놔두고 지켜보는 여백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리더가 보이는 대로 개혁의 칼날과 정의의 칼날을 휘둘러서 잘못된 것과 잘못된 사람을 보이는 대로 다 제거해 버리면 인간의 정의라는 것이 항상 흠이 있기 때문에 나중에는 사회적 분열이라는 더 큰 손실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역사의 순리와 역사의 승리를 믿고 부조리와 부정의에 대해 정의의 칼날만을 휘두르지 말고 기도의 손길을 모으는 일도 필요합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그렇습니다. 살다 보면 배우자의 결점이 너무 잘 보입니다. 자녀의 결점도 잘 보입니다. 그것을 단도직입적으로 다 척결하려고 하면 분명히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그냥 놔두고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단점과 거침돌을 부여잡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적절한 모습으로 잘못된 것을 처리하실 것입니다.

혼자 처리하려고 하면 하나님이 뒷짐 지고 계시겠지만 때로 여백을 남겨두면 하나님께서 그 여백 중에 임하셔서 가장 멋인 역사를 만들어내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처단하려고 하지 말고 여백의 마음으로 그들을 대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처단하지 않고 여백의 마음을 두시고, 오늘도 하루의 삶을 숨쉬고 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살다 보면 우리 가운데 마음에 안 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자세히 보면 그런 사람도 하나님이 아끼신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때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봐도 내 맘에 안들 때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살면서 실수를 얼마나 많이 하고 허물은 얼마나 많이 노출합니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오늘도 감싸주시고 덮어주시고 동행해 주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 앞에서 별로 인정받지 못해도 하나님은 끝까지 너를 인정한다. 끝까지 너를 기대한다. 너를 사랑한다. 너를 신뢰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여백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우리도 우리의 눈에 거침돌이 되는 다른 사람들에게 여백의 마음을 가지고 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그 사람에게도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고, 무엇보다 내가 더욱 복된 존재가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 눈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시고, 모든 상황을 지혜롭게 대처하며, 시간의 여유를 두고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릴 줄 아는 여유를 통해서 넉넉한 모습으로 난관을 극복하며 사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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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UNHANBU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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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부자의 성경공부 2017. 10. 18. 11:44

성경에는 다윗 왕정때 헌신한 세 용사가 나옵니다. 다윗 왕정에서 최고서열의 군대장관은 요압과 아마사였고, 일반장군 중에 최고의 첫째 3인은 요셉밧세벳, 엘르아살, 그리고 삼마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30인의 군장들이 있었는데 그 군장들 중에 대표가 둘째 3인인데, 그들은 요압의 동생인 아비새, 브나야, 그리고 익명의 한 군장입니다. 성경에는 그 둘째 3인이 다윗을 위해 헌신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들의 헌신과 충성을 보면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사랑이 무엇일까요? 

1. 깊이 잘 듣는 것 

성경 사무엘서를 보면 다윗이 참 철이 없어 보입니다. 자신의 군대가 산성에 있고, 블레셋 군대가 베들레헴 성에 있어 서로 군사적으로 대치하는데 그때 말합니다. “!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먹고 싶다. 누가 나로 저 물을 마시게 할까?” 베들레헴의 우물물은 다윗이 어렸을 때 자주 마시던 깨끗한 우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시에 어렸을 때의 향수에 젖어서 리더가 그렇게 마음이 약해지면 큰 문제가 됩니다. 

그런 말은 부하들의 가십거리가 될만한 말이었지만 세 용사들은 요새 주군이 이상해졌어!”라고 가십거리로 삼지 않고, 오히려 그 말을 마음속 깊이 들었습니다. 그처럼 말을 깊이 잘 듣는 것이 사랑의 기초입니다. 가끔 예배 후에 어떤 분은 말합니다. “목사님! 말씀 감사합니다.” 그러면 저는 잘 들어준 그분에게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말씀을 잘 전하는 것만큼 말씀을 잘 듣는 것도 훌륭합니다.

말씀을 잘 들으면 일 부탁하기도 편합니다. “집사님! 이것 좀 해주실래요?” 그러면 항상 !” 하고 무조건 대답부터 하고 봅니다. 천사표 교인입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인격과 신앙이 성숙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는 것도 이유가 되지만 가장 큰 이유는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왜 교회를 사랑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깊이 잘 듣는 것은 무엇보다 소중한 사랑의 행위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무서운 일은 말씀에 대한 존경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볼 때 자신이 높은 줄 알면 성경은 침묵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하나님 말씀으로 들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면 그때부터 침묵하던 성경은 말합니다. 그때부터 성경이 하나님 말씀으로 들려지고, 설교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집니다. 그때부터 축복의 역사는 놀랍게 시작됩니다. 

또한 말을 깊이 잘 들으면 이해력이 커집니다. 이해는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고 오해는 사단이 주는 마음입니다. 오늘날 가정이 왜 힘들어집니까? 대개 오해 때문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가사 돌보는 일이 쉽다고 오해해서 나는 밖에서 이 고생을 하는데 집에서 낮잠만 자면서 웬 불평이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사처럼 매일 반복되면서 별로 생색나지 않는 일은 생색나는 일보다 몇 배 힘듭니다.

남편은 기본적으로 아내에 대해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항상 속으로 여보! 이렇게 고생만 시켜서 미안하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반대로 아내도 남편에 대해 내 마음을 너무 몰라줘!”라고 하면서 너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로 자세히 설명해도 이해가 안 되는데 신이 아닌 사람이 어떻게 마음까지 알아줍니까? 

이제 내 마음을 너무 몰라줘!”라고 생각조차 하지 마십시오. 그런 생각을 하면 사단이 슬쩍 찾아와 그 생각을 증폭시키고 은혜와 축복을 짓밟습니다. 물론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것이 속상합니다. 그래도 그때 열심히 기도해서 그런 생각을 물리치고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차라리 내가 그 마음을 조금 더 알아주자!” 그 순간, 사단은 숨이 막혀 도망치고 성령님이 주시는 지극한 위로와 평강이 넘치고 결국 하나님의 축복도 넘치게 됩니다.

성숙한 사람은 어떤 일을 부탁받을 때 “No!"라는 말보다는 “Yes!”라는 말을 할 구실을 많이 찾습니다. 이제 믿음 안에서 “Yes!”라는 말을 잘할 줄 아는 훈련을 하십시오. 무조건 예스!”만 하는 예스맨이 되라는 말이 아니라 예스!”라는 말을 하면서 남을 격려하고 분위기를 띄워주는 예수맨이 되라는 말입니다. 그처럼 남의 처지를 이해해주고, 들어주고, 양보하면서 보다 큰 것을 얻는 삶이 바로 십자가의 삶입니다. 그런 삶을 추구하십시오.


2. 조용히 행동하는 것 

그때 세 용사는 베들레헴 성문 곁의 우물물을 먹고 싶다는 다윗의 말을 듣고 가만히 있지 않고 조용히 물을 구하러 갔습니다. 그들은 있던 아둘람 굴에서 베들레헴까지는 약 50리 정도 됩니다. 왕복 100리 길을 오직 물을 구하려고 적진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처럼 그들은 다윗을 어리석을 정도로 사랑했고 논리를 초월해 충성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조용히 헌신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어느 날, 이사야가 존경했던 웃시야 왕이 죽자 상심한 마음으로 성전을 찾았습니다. 그때 어두운 현실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꼬?” 그때 이사야가 고백했습니다. “하나니!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소서!” 그 고백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에 드셨겠습니까? 가끔 보면 어떤 분은 어려운 일을 앞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제가 그것을 맡겠습니다.” 그런 분들 보면 너무 기쁘고 마음에 흥분과 감동이 생깁니다. 그처럼 조용한 헌신은 영혼의 목마름을 해소하는 최대 청량제입니다.

왜 그때 세 용사가 다윗에게 물을 구하러 다녀오겠습니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다윗이 그 우물물을 먹고 싶어도 갖다오라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조용히 행동한 것입니다. 그처럼 조용히 행동할 때 더욱 감격이 됩니다. 어떤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가 못하면 무책임한 사람이 되지만 세 용사처럼 말을 안 해도 리더의 마음을 읽고 어느새 리더가 원하는 일을 해버리면 감동이 배가됩니다.

말을 잘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칭찬하는 말과 분위기를 밝게 하는 말을 많이 해주고, 꿈과 비전을 격려하고 믿음을 선포하는 말도 많이 해주십시오. 그러나 때로는 말없이 음지에서 봉사하는 시간도 많이 가지십시오. 특히 중요한 전략과 꿈과 비전을 이루는데 필요한 구체적인 정보들은 너무 쉽게 발설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사단이 끼어들어 그 말과 정보를 왜곡해서 비전을 방해합니다. 살다 보면 그런 일을 얼마나 많이 겪습니까? 그래서 인사 문제는 발표 전까지 그 내용을 극비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입니다. 믿음의 길에서 이탈하지만 않으면 하나님은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적합한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그러므로 너무 하나님의 때에 앞서서 말이 먼저 나가게 하지 마십시오. 물론 칭찬하고 격려하고 사랑하는 말은 많이 해주십시오. 그러나 고급정보와 전략은 비전동역자 외에는 함부로 말해주지 마십시오. 그처럼 찬란한 꿈과 비전을 가지고 나가면서 동시에 말없이 은밀하게 교회를 섬길 때 예수 믿고 인물 되는 역사가 교회와 각 가정에 넘치게 나타날 것입니다.

인생에는 2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참여자의 길이고, 또 하나는 방관자의 길입니다. 참여해야 은혜와 축복을 받습니다. 들러리 인생은 되지 마십시오. ‘주님의 신부신부의 들러리로 전락하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교회를 좌지우지하는 사람이 되지 않아도 교회를 위해 조용히 행동하는 성도는 되십시오. 그래서 교회에서 주인공은 되지 못해도 중심인물이 되기를 힘쓰면 하나님은 반드시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마가복음 10장을 보면 어느 날,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에게 주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하자 나머지 10제자가 분개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주님의 좌우편은 섬기는 자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축복을 원하면 자리에 신경 쓰지 말고 섬김에 신경 쓰라는 것입니다. 주님도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려고 이 땅에 오셨다고 했습니다(10:45). 결국 주님 닮은 모습은 교회를 잘 섬길 때 나타납니다. 그처럼 교회를 위한 정성스런 봉사는 이 땅의 축복과 천국의 상급을 저축하는 가장 복된 행위입니다.

3.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

결국 세 용사는 목숨을 걸고 적진으로 들어가 우물물을 길어 와서 다윗에게 드렸습니다. 그때 그 우물물은 물이 아니라 피였습니다. 그들은 가장 소중한 자신들의 피를 드린 것입니다. 그처럼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이 줄 수는 있지만 주는 것이 없이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진실한 관계는 드림과 나눔을 통해 형성됩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소중한 일에 몸과 마음을 드리면 이상하게도 영혼이 살아나고, 건강도 살아나고, 공동체의 사기도 살아납니다.

거목이 쓰러지면 그 쓰러진 거목이 거름이 되어 작은 나무들이 더 많이 생기듯이 교회도 부흥하려면 자신을 거름처럼 드려야 합니다. 취하려는 삶은 영혼의 갈증 나게 만들지만 바치려는 삶은 영혼을 풍성하게 만듭니다. 취하려는 삶은 눈물이 나오게 하지만 바치려는 삶은 노래가 나오게 합니다. 가장 복된 삶은 취하려는 마음보다 바치려는 마음이 큰 삶입니다. 바로 그때 진정한 행복도 찾아옵니다. 

얻음은 행복이지만 드림은 더욱 큰 행복입니다. 시성 타고르는 노래했습니다. “바람이 불어 배 안의 등불이 꺼지니 뱃전에 달빛이 차더라!” 세상 욕심을 버리고 더 많이 나누고 드리면 하나님은 더욱 크고 소중한 것을 채워주십니다. 어떤 분은 드리고는 싶은데 여건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드리고 싶은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은 반드시 드릴 수 있는 능력도 주실 것입니다.

세 명이 용사가 가져다 준 우물물을 받고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그 엄청난 헌신을 보고 다윗은 이기적인 감성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어리석은 육신적인 욕망을 깊이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원했던 소중한 물을 전혀 마시지 않고 그냥 하나님께 부어드렸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이 물은 자신의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갔던 사람들의 피입니다. 저는 도저히 마실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 점이 다윗의 위대한 점입니다. 그는 회개할 줄 알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부하들이 얼마나 감동이 되겠습니까? 부하들은 목숨을 각오한 은밀한 헌신으로 다윗을 감동시켰고, 다윗은 자신의 육신적인 욕망을 과감히 버림으로서 부하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때 그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결국 그 일로 인해 그들은 더욱 비전 안에서 하나가 되었고 결국 나라까지 얻게 된 것입니다

- 이한규목사님 사무엘서 강해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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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UNHANBU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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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부자의 성경공부 2017. 10. 18. 10:00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로마서 31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죄는 우리의 본성 안에 있습니다. 시편 51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누구도 죄에서 면제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남에게 상처를 입고, 남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무엇이 해결책입니까? 

어떤 사람은 상처는 시간이 해결해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목회를 하다 보면 몇 십 년 전의 상처 문제로 여전히 고민하는 사람들을 많이 발견합니다. 처리되지 않은 죄는 시간이 지날수록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악화됩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해결책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를 빌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다윗의 삶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성경에는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후에 그 죄를 감추려고 더욱 큰 죄를 저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윗이 약 50세쯤 되어 나라에 큰 전쟁이 있을 때, 그는 저녁에 잠이 잘 오지 않아 왕궁 지붕 위를 거닐었습니다. 잠이 오지 않으면 국가적 비상시기에 국사를 살피며 기도했어야 했지만 기도하지 않고 파자마를 입고 왕궁 지붕 위를 거닐다가 그만 밧세바가 목욕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죄는 언제 찾아옵니까? 대개 한가하게 지내고 기도하지 않을 때 옵니다. 독일 격언에는 게으름은 모든 죄의 시초라는 말이 있고, 러시아 격언에는 게으름은 악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일랜드 격언에는 가난은 게으름의 문에서 기다린다.”는 말이 있고, 미국 격언에는 게으른 손은 악마의 일터라는 말이 있습니다. 잠언 1915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해태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휴식과 게으름은 다릅니다. 휴식은 더 열심히 일하기 위해서 잠시 쉬는 것입니다. 휴식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게으름은 유혹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다윗과 밧세바의 범죄는 바로 다윗의 게으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다윗이 왕궁을 거닐다가 밧세바의 목욕하는 장면을 보고 밧세바를 불렀을 때 밧세바는 고민하거나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온갖 애교를 떨었을지 모릅니다. 다윗은 잘생겼고, 나이는 많지만 능력 있는 남자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비밀스럽게 함께 즐겼습니다. 그 비밀스런 관계가 사람을 더 성적인 범죄에 끌리게 만듭니다. 우리만의 비밀이라는 것이 스릴을 주고, 또한 그 관계가 들통 나면 난리가 난다는 사실도 스릴을 주기 때문에 그 관계를 끊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적인 유혹에서는 처음부터 무조건 도망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관계가 완전히 비밀에 붙여질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 생각이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혹시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고,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6:7). 


결국 성경 말씀대로 얘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4절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저가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밧세바는 자기의 매달 주기가 막 끝났기에 임신 기간이 아닌 줄 알고 다윗과 동침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만 임신이 되어버렸습니다. 

약 한 달 후에 밧세바는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고 다윗에게 그 소식을 알렸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다윗이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죄는 항상 가격표가 있습니다(Sin always has a price tag). 그 가격표는 항상 비쌉니다. 그 중에서 성적인 범죄의 가격표는 가장 비싸서 항상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합니다.

그 상황에서 다윗은 철저히 회개했어야 했습니다. 죄와 잘못을 고백하면 부끄럽게 될 수 있고, 행동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고 벌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 고백으로 죄의 사슬은 끊어집니다. 그러나 죄를 거짓말과 속임수로 감춘다면 훨씬 더 나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안타깝게도 그 사실을 감추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진짜 감출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일을 감추려고 다윗은 한 가지 기발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불러들여 전황과 안부를 물은 뒤 수고했다고 치하하고 집에 가서 발을 씻으라!”고 했습니다(8). 그것은 우리아의 발이 냄새가 났다는 말이 아니라 편히 쉬고 아내와 함께 지내라는 히브리적인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아와 밧세바가 같이 잠자리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9달 만에 아이를 낳는 경우도 많으니까 아무도 그녀의 불륜 사실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밤 다윗은 잠을 잘 잤을 것입니다. 이제 모든 성가신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날 신하로부터 우리아가 집에 가지 않고 다윗의 신하들과 함께 왕궁 문에서 잤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9). 왜 집에서 자지 않았으냐고 다윗이 물으니까 우리아는 큰 전쟁 중에 집에서 자기만 편히 잠을 잘 수 없어서 그랬다고 말했습니다.

그처럼 모델처럼 예쁜 아내가 있는 몇 십 미터 떨어지지 않은 집을 놔두고 왕궁 문에서 잠을 자는 그 충성심을 다윗은 크게 치하해야 했지만 다윗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두 번째 계획을 세웁니다. 그래서 본문 13절 말씀을 보면 우리아를 만찬에 초대해서 그를 칭찬하며 먹고 마시게 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아의 군기를 빠지게 하고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빌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아가 이번만은 집으로 가게 하소서!” 그러나 이번에도 우리아는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 놀라운 충성심에 그는 자신의 죄를 고백했어야 했지만 다윗은 더 파괴적인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비밀 편지와 함께 우리아를 전쟁터로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요압에게 비밀 편지를 보내서 전쟁터에서 우리아를 죽게 만듭니다. 그러자 이제 사건은 종결된 것 같았습니다. 곧 다윗은 편한 마음으로 밧세바와 결혼을 합니다(27). 

당시 다윗 왕이 전쟁 영웅의 과부와 결혼한다는 소식은 큰 뉴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9달이 채 못 되어서 아들을 낳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점에 대해 의문을 가졌겠지만 누가 왕에게 책임을 추궁하겠습니까? 아무도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못해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27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결국 다윗은 그의 명성에 큰 오점을 남기게 되고 그 죄의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이 다윗의 간음사건이 주는 몇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죄는 어느 날 갑자기 짓는 것이 아니라는 교훈입니다. 우리가 짓는 죄를 보면 이미 마음속에 그 죄가 오랫동안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다윗은 성적 욕구로부터 도망치는 법을 훈련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밧세바와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상한 그림으로부터 도망치고, 다른 상대와 부적절한 관계로부터 도망치고, 모든 범죄로부터 도망쳐야 합니다. 

둘째, 죄의 파괴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교훈입니다. 다윗이 일생 동안 쌓았던 명성이 몇 시간의 죄로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보십시오. 몇 시간의 죄는 가볍게 지나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몇 시간의 죄도 무서운 것입니다. 그리고 몇 시간의 죄의 유혹은 누구나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셋째, 죄는 감추면 대개 눈 덩이처럼 불어난다는 교훈입니다. 다윗은 처음에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 간음죄만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 간음죄를 덮기 위해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결국 가장 충성스런 부하와 다른 군사들을 죽였습니다. 죄는 결코 한번 저지르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증식됩니다(Sin multiplies). 그러므로 죄가 아닌 것 같아도 꺼림칙하면 처음부터 멀리하는 것이 좋고, 빨리 그만두는 것이 좋습니다. 

넷째, 죄의 해결방법은 하나님 앞에 자백하는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죄는 감추면 눈 덩이처럼 불어나지만 자백하고 회개하면 누구나 용서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잠언 2813절은 말합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 우리가 용서받지 못할 죄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꾸 죄를 합리화하려고 하지 말고 깨끗이 자백해야 합니다. 

어느 날, 아빠가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알렉스! 잠깐 와봐라! 자동차의 이 부분이 상처 났는데 네가 긁었니?” 아들이 말했습니다. “제가 긁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네가 어제 차를 몰고 갔잖아? 네 동생 모니카가 네가 차를 후진시키다가 우체통과 부딪치는 것을 봤다고 했다.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 그때 아들이 말했습니다. “저는 거짓말을 안했어요. 저는 정말 차를 긁지 않았어요. 우체통이 긁었어요.” 

그런 요상한 언어로 거짓말을 하며 합리화하려는 모습도 있습니다. 그런 말로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합리화하면 하나님이 더욱 괘씸하게 보실 것입니다. 그런 태도는 심판과 진노를 쌓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깨끗이 잘못이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를 입습니다. 

오늘날 죄의 문제에서 완전히 깨끗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죄로부터 자신을 지키겠다는 결심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인 이유는 아무리 큰 죄를 범했다고 해도 진심으로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과거를 깨끗이 씻어주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19절은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과거가 어떻든 상관없이 오늘 이 시간부터 결심하십시오. "하나님! 항상 저의 몸과 영혼이 깨끗하게 하나님 앞에 드려지기를 원합니다. 저의 이 결단을 힘써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그런 결단을 통해서 가정과 교회를 잘 지키고, 주님 만나는 날 정결한 처녀의 모습으로 기쁘게 만날 수 있는 분들이 다 되길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님의 사무엘 강해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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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부자의 성경공부 2017. 10. 17. 16:11

민수기 1426-35절에 나오는 말씀을 통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본문 바로 앞부분에는 12정탐꾼의 보고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고 불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12명의 정탐꾼이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와 모세와 백성 앞에서 보고할 때 어떤 장면이 펼쳐집니까? 30절 말씀을 보면 갈렙은 우리가 그 땅을 능히 취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33절을 보면 다른 정탐꾼들은 우리는 그들에 비하면 메뚜기 같다고 합니다. 즉 오늘날 흔히 말하는 메뚜기 신드롬을 나타냅니다. 그러자 141절을 보면 백성들이 밤새도록 곡을 합니다. 그리고 2절을 보면 그들을 이끈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3절을 보면 하나님까지 원망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하나님은 11절에서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고 합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모세가 19절에서 백성의 죄를 사해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20절에서 하나님은 그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어떤 조치를 취하셨습니까? 25절 말씀을 하반부를 보십시오. “너희는 내일 돌이켜 홍해 길로 하여 광야로 들어갈지니라.”

하나님께서 용서는 하셨지만 무엇인가 새로운 계획을 세우시고 그들을 바로 가나안 땅으로 가게 하지 않고 광야로 들어서게 합니다. 왜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시고, 광야에서 40년의 기간을 지나게 하셨을까요? 첫째 이유는 그들이 원망하고 불평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원망과 불평을 지극히 싫어하시고, 반대로 찬양과 감사를 지극히 기뻐하십니다.

성도는 무엇보다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감사가 없는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입니다. 미국에 가면 영어를 잘 못해도 “Thank you. Excuse me.”란 말만 잘해도 어느 정도 대접을 받습니다. 감사를 잘하는 나라가 선진국이듯이 감사를 잘하는 영혼이 선진 영혼입니다. 지속적으로 감사 훈련을 하십시오. 원망과 불평은 가만히 있어도 잘 자라지만 감사는 아름다운 꽃처럼 계속 정성껏 길러야 감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분복을 감사하며 사십시오. 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 됩니까? 교만하면 감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가 됩니까? 겸손한 사람은 감사를 알기 때문입니다. 이해인 수녀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습니다.

급한 순간에 버스를 놓쳐 안타까울 땐 즉시 다음 버스가 있음을 기뻐한다/ 몸이 아파 괴로울 땐 건강의 고마움을 절감하며 기뻐한다/ 글이 써지지 않아 답답할 땐 내 능력의 한계를 깨치게 됨을 기뻐한다/ 다른 이에게 내 실수가 드러나 부끄러울 땐 겸손을 실습할 기회임을 기뻐한다/ 오해 받아서 슬플 땐 인내할 수 있는 기회임을 기뻐한다/ 이 모든 일들이 신앙 안에서는 더욱 가능한 것임을 기뻐하고 감사한다.”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눈이 있고, 손발이 있고, 걸을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면 감사할 조건의 90% 이상을 가진 셈입니다. 조금 생각만 달리하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시각 장애인은 한번만 보고 다시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감사이고, 은혜입니다. 이제 불평과 원망은 십자가 밑에 묻고 감사하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원망은 광야의 삶을 예비하고, 감사는 광야의 삶을 끝나게 합니다.

 

< 애굽의 사고를 버리십시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로 내몬 이유는 원망과 불평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고 불순종할 때가 다른 때도 많았지만 애굽에서 나올 때에는 특별히 광야로 내몬 이유가 있습니다. 본문 35절을 보면 그 이유는 하나님이 거역한 백성들을 광야에서 소멸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너무 잔인한 것 아닙니까? 어떻게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매정하게 하십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어떻게 하는가?”라고 인간 중심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하는가?”라는 점을 생각하면 사실상 우린 할 말이 없고 그저 하나님의 모든 조치에 아멘!”하고 받아야 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불평하고 원망하는 백성들을 광야에 묻어야만 하는 더 깊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광야에서 세대교체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세대교체를 통해 새로운 사고와 신앙을 심어 줌으로 백성들에게 건강한 민족정신을 주시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오긴 했지만 아직도 그들의 사고는 병든 애굽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처음 애굽으로 들어갈 때 그들은 여호와 중심적 신앙으로 무장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에 있는 동안 그만 신앙이 병든 것입니다. 그런 마음상태와 사고방식으로 가나안 땅에 가면 그냥 망합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살았던 기성세대로는 새로운 역사 창조가 불가능하다고 본 것입니다.

당시 가나안 땅에는 이미 거대한 아낙 자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기보다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어야 하는 땅입니다. 즉 근면하고 건강하고 창조적인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처럼 가나안 땅을 얻으려면 어느 정도의 고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애굽에 있는 동안 그들의 야성은 매우 약해졌습니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하나님 말씀 한 마디만 의지하고 신천지로 떠난 위대한 개척정신을 가진 사람입니다. 또한 야곱은 어떤 사람입니까?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다가 나중에는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입니다. 그처럼 조상들은 삶의 치열한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야성이 넘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에 사는 동안 그들의 마음이 정신이 그 야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개척정신도 없이, 어린아이처럼 투정이나 하고 지냈습니다. 그런 정신을 가지고 가나안 땅에 며칠 안에 들어가면 그 순간은 은혜처럼 보이지만 그 다음에는 가나안 족속에게 다 죽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그들의 근성을 탈색하기 위해서 광야의 기간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한번 굳어진 근성은 변화되기가 힘들고, 변화되어도 적합하지 않은 옛 사고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처럼 애굽에서 길들여진 불신앙와 노예적인 병든 사고를 가진 모습은 도저히 변화되기 어려운 것으로 하나님이 아셨습니다. 그런 모습이 치열한 가나안의 생존의 과정에서는 안 맞는 것이었고, 그렇다고 그들의 변화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어야만 해결된다는 것을 알고 광야에서 세대교체를 하신 것입니다.

 

< 새로운 사고를 가지십시오 >

또한 세대교체를 한 또 하나의 이유는 기성세대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상 광야 세대는 물들지 않은 세대인데 기성세대와 함께 있으면 자꾸만 물이 듭니다. 좋은 것은 늦게 전염이 되지만 안 좋은 것은 너무 쉽게 전염이 됩니다.

젊은 국회의원들이 국회에 들어가면 구세대의 거수기 노릇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처럼 세대교체라는 것이 말이 쉽지 실상을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염성의 뿌리를 차단하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 들이셨고, 그 뿌리를 차단하는 기간이 장장 40년이 걸렸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야의 40년의 세월은 징벌과 심판의 기간만은 아니었습니다. 광야 40년 기간은 새로운 세대를 키워내는 창조적인 기간이었습니다.

광야 세대는 철저한 믿음의 역사를 체험한 세대입니다. 그리고 불평도 있었지만 순종하는 믿음으로 놀라운 은총을 많이 체험했던 세대입니다. 광야기간 중에 하나님은 직접 선생이 되셔서 그들을 키워가셨습니다. 그 기간은 영적 열등생에서 영적 우등생으로 다듬어 가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바로 졸업시험을 치루는 순간입니다.

요즘 젊은 피를 수혈하자는 말이 각 분야에서 돕니다. 세대교체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늙은 피들이 긴장해서 항변합니다. “몸이 젊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젊은 것이 중요하다.” 맞는 말입니다. 세대교체는 연령 교체로 이루어지지 않고 사고 교체로 이루어집니다. 즉 구세대적인 사고가 신세대적인 사고로 바뀌어야 합니다.

믿는 사람에게도 신 사고가 필요합니다. 믿는 사람에게 무엇이 신 사고입니까? 하나님 중심적인 시야를 가지고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을 크게 보고 문제를 적고 보는 사고가 신 사고입니다. 신 사고를 가지고 있을 때 신앙은 건강성을 잃지 않게 됩니다. 신 사고를 가지고 날마다 생동감 있는 신앙을 만들어 승리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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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UNHANBU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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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부자의 성경공부 2017. 10. 17. 06:29

사무엘하 218-32절에는 아사헬의 죽음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지혜로운 인간관계의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아래 내용은 이한규목사님의 강해 내용입니다)  

사무엘하 처음 부분에는 다윗 진영과 죽은 사울 진영 간의 전투 장면이 나옵니다. 본문 바로 앞에서는 다윗의 군대장관인 요압의 군사들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군대장관인 아브넬 군사들과의 첫 번째 전투장면이 나옵니다. 그 첫 번째 전투에서 요압이 이겼는데, 오늘 본문은 그 전쟁 후에 일어난 일을 묘사하는 장면입니다. 자세한 내용을 살펴볼까요?

본문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곳에 스루야의 세 아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이 있었는데 아사헬의 발은 들 노루 같이 빠르더라.”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에게는 아비새와 아사헬이라는 두 형제가 있었는데, 3형제가 모두 다윗의 용맹한 장군들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아사헬이 가장 발도 빠르고, 가장 날렵했습니다. 

그 아사헬이 전쟁에서 패배해서 도망가는 아브넬을 뒤쫓았습니다. 아브넬은 평소에 아사헬의 명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20절 말씀에서 뒤를 돌아보며 너 아사헬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아사헬이 그렇다고 하니까 본문 21절 말씀을 보면 아브넬이 아사헬에게 네 좌우를 돌아보면 네가 잡을 소년이 많다. 그 중에 하나를 잡고 나를 쫓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사헬은 그 소리를 듣지 않고 계속 아브넬을 쫓았습니다. 

그러나 본문 22절에서 아브넬은 다시 한번 아사헬에게 말합니다. “너는 나를 쫓지 말라. 내가 너를 죽이고 싶지 않다. 너를 죽이면 내가 네 형 요압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그 장면을 보면 평소에 아브넬과 요압이 친분도 있었고, 아브넬이 싸움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도 아사헬이 그 말을 듣지 않으니까 결국 아브넬이 창으로 그의 배를 찔러 죽였습니다. 그러자 뒤쫓아 오던 모든 요압의 군사들이 아사헬이 죽은 곳에 머물러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문 24절 말씀을 보면 아사헬의 죽음을 본 그의 형 요압과 아비새는 계속 아브넬을 뒤쫓아서 기아라는 지역의 맞은편 암마 산까지 이르렀을 때에 해가 졌습니다. 그때 본문 26절 말씀을 보면 아브넬이 작은 산꼭대기에 서서 요압에게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굳이 칼을 계속 휘둘러야 하겠느냐? 그러면 비참한 일만 생긴다. 결국 너와 우리는 형제가 아니냐? 언제쯤 형제 쫓기를 그치라고 명하겠느냐?”


그 말에 요압이 대답합니다. 본문 27절 말씀을 보십시오. “요압이 가로되 하나님이 사시거니와 네가 흔단의 말을 내지 아니하였더면 무리가 아침에 다 돌아갔을 것이요 그 형제를 쫓지 아니하였으리라 하고.” 언뜻 보면 무슨 뜻인지 파악하기 힘듭니다. 여기서 흔단의 말이란 싸움을 끝내는 말을 말합니다. 즉 네가 싸움을 끝내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아침까지 계속 형제를 쫓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한 뒤에 요압은 나팔을 불어 더 이상 아브넬 군사들을 쫓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29절 말씀을 보면 아브넬과 그 군사들이 밤새도록 행군해서 아라바를 지나 요단강을 건너고 다시 비드론 땅을 지나 그들이 임시 수도로 정한 마하나임에 도착했습니다.

그 접전 후에 30절 말씀을 보면 요압이 돌아와서 전과를 살펴보니까 자기 군사들 중에서는 19명과 아사헬, 20명이 죽었고, 아브넬의 군사 중에서는 360명이 죽었습니다. 그 전쟁을 끝내고 요압과 그 군사들이 아사헬은 베들레헴에 있는 그 아비 묘에 장사하고 나서 그들도 밤새 행군해서 자기들이 수도로 정한 헤브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동역의 중요성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스루야의 세 아들은 다윗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맹장들이었습니다. 특히 본문 32절에서 아사헬을 베들레헴에 있는 그 아비 묘에 장사했다는 말씀을 보면 스루야의 세 아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은 다윗과 고향이 같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원장이 자기 동향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명나라를 세웠듯이 다윗에게는 동향 사람들인 이 스루야의 세 아들이 그가 왕이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맹장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보면 그 세 아들인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이 다윗이 왕이 된 후에 있었던 사울의 추종자들과의 첫 번째 싸움에 다 참여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의 용맹으로 그 첫 번째 싸움을 승리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브넬의 군사들이 패퇴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아사헬은 용맹한 것은 좋지만 혼자서 아브넬을 잡겠다는 마음으로 아브넬을 뒤쫓다가 결국 아브넬에 의해 죽게 됩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아무리 용맹한 사람이라도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사회생활을 하고,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아사헬과 같은 사람을 보게 됩니다. 아주 재능이 많습니다. 똑똑합니다. 그런데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공동체의 뜻을 이루는 것도 힘들게 되고, 본인도 결국 비극적인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들 노루처럼 발 빠른 사람이 되는 것도 때로는 필요하겠지만 더욱 필요한 것은 동역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알게 하시고 함께 있게 하신 동역자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 가족만큼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도 이탈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새 권사님들의 건강을 위해서 매일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 권사님들이 한분도 이탈하지 않게 하소서! 작은 힘으로도 멋진 작품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권사님들도 같이 보게 하소서!” 우리는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실질적인 힘을 주려고 지혜를 짜내고 기회를 엿보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를 통해서 반드시 큰 역사를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2. 용서의 중요성 

오늘 본문에서 왜 아사헬은 아브넬을 기를 쓰고 쫓아갔을까요? 아브넬에 대한 미움과 원한 때문이었습니다. 아사헬은 아브넬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상 오늘 본문 22절 말씀을 보면 아브넬은 아사헬과 싸우기를 원하지 않았고, 본문 26절 말씀을 보면 칼은 참혹한 일만 만든다. 우리가 형제끼리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느냐?”고 한 것을 보면 아브넬은 동족끼리 서로 죽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사헬을 미움을 이기지 못하고 이성을 잃고 아브넬을 뒤쫓다가 결국 자기 자신이 죽게 됩니다. 칼은 칼을 부르는 것처럼 미움은 미움을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보면 미움은 미워하는 상대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영혼을 죽입니다.

요나 선지자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니느웨를 미워하고 망하기를 바라서 정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탑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가 탄 배에 풍랑을 만나게 하시고, 물고기 밥이 되게 하셨습니다. 미워하니까 자신이 죽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가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니까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로마서 1219절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스스로 원수를 갚으려고 하면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지만, 하나님의 손에 맡기면 하나님께서 다 멋있게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원수를 갚으려고 하지 말고 용서하려고 해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용서도 없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용서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우리가 진정 축복 받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가 되려면 힘써 용서해야 합니다. 미워하면 내 영혼이 점차 마르게 되지만 용서하면 내 영혼이 점차 풍성하게 됩니다.

미워하는 사람의 마음은 굴뚝과 같습니다. 굴뚝에서 연기가 나가면 옆집도 까맣게 되지만 그 전에 자신의 마음의 연통이 까맣게 됩니다. 그처럼 무슨 억울한 사연이 있든지 상관없이 이웃을 미워하면 내가 먼저 망하게 됩니다.

가끔 우리는 이런 말을 듣습니다. “저 사람은 도저히 희망이 없어!” 그런데 그런 말을 하기 전에 우리는 그 사람의 결점을 덮어주고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사실상 내게도 무수한 결점들이 있습니다. 사람의 결점들은 자동차 헤드라이트와 같아서 남의 자동차 헤드라이트는 내 것보다 훨씬 밝게 보입니다. 그처럼 남의 결점은 내 결점보다 훨씬 커 보입니다. 그 사실을 생각하고 우리는 다른 사람의 결점을 힘써 용납하고 용서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저 사람을 바꿔주세요. 너무 바뀌지 않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 기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용서하지 못한 것을 이 시간 회개합니다. 제가 먼저 변하도록 도와주시고, 용서하는 마음을 주세요.” 그렇게 멋지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고 축복의 문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물론 용서는 쉽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용서하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그래도 그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 십자가를 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도 무엇보다 그 십자가를 잘 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내 생각으로는 도저히 용서하지 못할 일도 하나님께서 힘주시고, 성령 충만을 주시면 용서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크신 용서를 생각하고 용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진심으로 용서하면 신기하게도 우리 주변에 우리를 얽어매던 수많은 사슬들이 신기하게 풀리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2가지 중요성, 동역의 중요성과 용서의 중요성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축복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사람과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항상 겸손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인간관계의 승리자가 되고, 하나님의 축복을 예비하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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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UNHANBU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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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부자의 성경공부 2017. 10. 16. 18:55

구약성경 사무엘하 말씀에서 다윗의 성품을 통해 우리의 낮은 퀄리티의 성품을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게 그 내용을 이한규 목사님의 강해를 통해서 배워보도록 합니다. 


"17다윗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기리는 장례 노래를 불렀습니다.

18다윗은 유다 백성에게 이 노래를 가르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노래는 '활'이라고 부르며, 야살의 책에 씌어 있습니다.

19"이스라엘아, 너의 지도자들이 언덕에서 죽임을 당했구나. 아, 용사들이 싸움터에서 쓰러졌구나.

20그 일을 가드에서 말하지 마라. 그 일을 아스글론 거리에서 이야기하지 마라. 그 일을 말하면 블레셋의 들이 기뻐할 것이다. 할례받지 않은 자들의 이 즐거워할 것이다.

21길보아 산에 이슬이나 비가 내리지 말지어다. 그 들에서 곡식이 나지 말지어다. 거기에서 용사들의 방패가 부끄러움을 당했도다. 사울의 방패는 더 이상 기름칠 할 수 없게 되었구나.

22요나단의 활은 많은 적을 죽였고, 사울의 칼도 적들을 죽였다. 그들의 무기는 죽은 자들의 피로 물들었고, 그들의 무기는 강한 자들의 살에 박혔다.

23우리는 사울과 요나단사랑했다. 그들이 살아 있는 것을 기뻐했다. 사울과 요나단은 죽을 때에도 함께 죽었다. 그들은 독수리보다 빨랐고 사자보다도 강했다.

24너희 이스라엘의 들아, 사울을 위해 울어라. 사울은 너희를 붉은 옷으로 입혔고 너희 옷에 황금 장식을 달게 했다.

25아, 용사들이 싸움터에서 쓰러졌구나. 요나단이 길보아 언덕에서 죽었구나.

26내 형제 요나단이여, 내가 너를 위해 우노라. 너는 나를 너무나 사랑하였지. 네가 나를 사랑함이 놀라웠으니 여자들의 사랑보다도 놀라웠다.

27아, 용사들이 싸움터에서 쓰러졌구나. 전쟁 무기들이 사라져 버렸구나."


본문에 나오는 활 노래를 통해서 우리는 다윗이 어떤 사람이고, 복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고 어떤 성품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에 관한 몇 가지 교훈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 어떤 성품을 가지고 있어야 할까요?


1. 너그럽게 용서하는 성품

본문 23절 말씀에서 다윗은 사울로부터 받은 모든 고통을 다 잊어버리고,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을 추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라고 표현하고 있고, “저희는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나단은 그렇게 표현할 수 있지만 자기를 수없이 죽이려고 했던 사울을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로 표현한 것을 보면 다윗이 얼마나 도량이 넓은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과거의 한 맺힌 일을 깨끗이 잊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축복하십니까? 과거의 맺힌 일을 잘 잊을 줄 아는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사람들이 왜 불행하게 삽니까?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기억하면 좋지 않은 일들을 너무 잘 기억하는 기억력 때문에 불행합니다. 그러므로 행복하게 살려면 좋지 않은 일에 대한 기억은 금방 잊어버리는 거룩한 건망증이 있어야 합니다.

요새 정치를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있습니다. 일부 정치인들을 보면 과거의 불행했던 일을 가지고 너무 싸우는 것 같습니다. 할 일이 참 많은 데 정치인들이 보다 큰 세계에 대한 관심이 너무 없습니다. 몇 년 전에는 일년 내내 여자 옷 가지고 전 국회의원들이 거기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요새 신문기사들은 감동과 도전을 주기보다는 밑바닥 이야기만 너무 많습니다. 그런 이야기만 들으면 우리의 영혼은 점차 오염이 됩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과거의 불행했던 역사도 다 우리의 성숙과 발전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와 미래입니다. 우리는 어떤 절망적인 일을 당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얼마든지 가장 복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고 앞날을 개척해야 합니다.

어떤 이유를 댄다고 해도 협소한 마음은 사단이 주는 마음이고, 넉넉한 마음은 성령님께서 주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사단의 의도대로 맺혀서 살지 말고, 성령님의 감동대로 맺힌 것은 털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이 아침에도 그런 성령 충만한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자기를 십여 년 죽이려고 쫓아다닌 사람을 칭찬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우리가 남을 칭찬하면 하나님께서 칭찬해주시고, 원수까지 칭찬하면 하나님께서는 너야말로 나를 영화롭게 하는 자구나! 너의 진실한 믿음을 보니 내가 기쁘다고 하시고 크게 칭찬해주실 것입니다.



2. 남의 장점을 보는 성품

본문 24절에서 다윗은 사울을 추모하면서 저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 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라고 추모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보면 신정정치 시대에서 왕정정치 시대로 넘어가면서 고대국가가 형성됩니다. 이스라엘도 사사 시대가 끝나고 왕정정치 시대가 시작되면서 고대국가가 형성되는데, 그렇게 해서 형성된 국가의 첫 왕이 바로 사울입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서 국가적인 기틀을 마련하는데 상당한 공헌을 했고, 24절 말씀을 통해서 추정하면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도 많이 발전시켰던 것 같습니다. 물론 사울에게도 여러 가지 과실이 많이 있었지만 다윗은 사울의 과실보다는 공로를 생각하며 그를 추모하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복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은 평가할 때 그의 과실보다는 공로를 더 많이 보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요새 왜 정치가 혼란합니까? 공로보다 과실을 항상 크게 보기 때문입니다. 남의 약점은 말하지도 말고 아예 듣는 것도 멀리해야 합니다. 남의 약점을 찾고 비판거리를 찾기에 힘쓰는 열성당원은 자기 자신이 어둠의 노예가 됩니다.

우리는 어떤 사건을 보고, 어떤 사람을 볼 때 과실보다는 공로를 더 많이 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단점보다는 장점을 많이 보도록 하고, 비판보다는 칭찬을 많이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칭찬할만한 장점이 있습니다. 그 부분을 찾아 칭찬하기를 힘쓰면 세상은 밝아지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다윗처럼 축복하실 것입니다.


3. 은혜를 잊지 않는 성품

본문 26절 말씀을 보십시오. 다윗은 요나단을 추모하며 노래합니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 중에서 특별히 요나단에 대한 진한 자신의 사랑을 본문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형 요나단이라는 표현은 실질적으로 다윗보다 요나단이 나이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나이가 많아서 그렇게 표현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 표현에는 친구 요나단에 대한 깊은 존경심이 담겨 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뜨게 되면 자기는 왕의 여러 아들 중에 가장 촉망받는 아들로서 왕권이 위협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변호하고 보호해주었습니다.

또한 다윗은 요나단이 심히 아름다웠고 자신을 사랑하는 요나단의 사랑이 여인의 사랑보다 컸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고백은 요나단이 여자처럼 힘이 약하고 그냥 부드럽기만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무엘상 14장에 나오는 블레셋과의 전투를 보면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 중에서 일당백의 전투력을 가진 가장 용맹한 아들이었습니다.

그처럼 큰 용사였던 요나단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극복하기 힘든 이기심과 질투심을 넉넉한 모습으로 극복했습니다. 다윗이 뜨는 해가 되고 자기가 지는 해가 되어도 넉넉한 모습을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에 대해서 다윗은 그의 사랑이 여인의 사랑보다 크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훌륭한 두 인격을 보게 되고, 진실한 친구관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보게 됩니다. 요나단의 가장 훌륭한 점은 자기보다 남을 앞세울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이었고, 다윗의 가장 훌륭한 점은 누구로부터 받은 사랑과 은혜를 결코 잊지 않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받은 은혜와 사랑을 잊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원망할 일과 원한은 다리 아래 물처럼 떠내려 보내고, 감사할 일과 은혜는 돌에 새겨 오래 간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정신도 건강하게 되고, 신앙도 건강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에게 놀라운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항상 넉넉한 믿음과 감사하는 태도로 하나님의 축복을 예비하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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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UNHANBUJA
:
선한부자의 성경공부 2017. 10. 15. 15:25

(삼하 19:40)

왕이 길갈로 건너오고 김함도 함께 건너오니 온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이나 왕과 함께 건너니라

(삼하 19:41)

 이스라엘 사람이 왕께 나아와 왕께 아뢰되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이 어찌 왕을 도둑하여 왕과 왕의 집안과

왕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가게 하였나이까 하매

(삼하 19:42)

모든 유다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대답하되 왕은 우리의 종친인 까닭이라 너희가 어찌 이 일에 대하여 분 내

느냐 우리가 왕의 것을 조금이라도 얻어 먹었느냐 왕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 있느냐

(삼하 19:43)

이스라엘 사람이 유다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는 왕에 대하여 열 몫을 가졌으니 다윗에게 대하여 너희

보다 더욱 관계가 있거늘 너희가 어찌 우리를 멸시하여 우리 왕을 모셔 오는 일에 먼저 우리와 의논하지 아니하

였느냐 하나 유다 사람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의 말보다 더 강경하였더라.

 

구약성경 삼무엘하 말씀 위본문을 통하여 질투로 생기는 부정적인 일들과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이한규 목사님의 성경 강해를 통해서 배워봅시다.

본문에서는 다윗 왕이 왕권을 회복하고 돌아올 때 영접하는 문제로 유다 지파와 이스라엘 지파 사이에 감정이 생기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다윗이 반란을 피해 요단 강 건너편으로 피신했지만 이제 반란을 진압하고 바르실래의 아들 김함과 함께 요단강을 건너올 때 누가 왕을 호위했습니까?

본문 40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온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이나 호행하니라.” 유다 지파 사람과 이스라엘 나머지 지파 사람들이 함께 왕을 호위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나머지 지파 사람들은 불만이 생겼습니다. 압살롬의 반란은 유다 지파의 본거지인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났는데, 반란이 진압된 후에 유다 지파가 다시 왕과 가까운 척 왕을 호위하니까 이스라엘 나머지 지파가 얼마나 약이 오릅니까?

그래서 이스라엘 나머지 지파 사람들이 다윗 왕에게 말했습니다. 본문 41절 말씀을 보십시오. “온 이스라엘 사람이 왕께 나아와서 고하되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이 어찌 왕을 도적하여 왕과 왕의 권속과 왕을 좇는 모든 사람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네었나이까 하매.” 유다 사람들은 벌을 받아도 시원찮은데 유다 사람들이 왕을 인도하도록 놔두느냐는 말입니다.

그때 유다 사람들도 말했습니다. 본문 42절 말씀을 보십시오. “유다 모든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대답하되 왕은 우리의 지친인 까닭이라. 어찌 이 일에 대하여 분 내느냐? 우리가 왕의 물건을 조금이라도 먹었느냐? 왕께서 우리에게 선물 주신 것이 있느냐?” 이스라엘 사람들의 도발적인 말을 듣고 유다 지파 사람들이 왕은 우리 지파 출신이라서 모셔오는데 왜 화를 내느냐? 우리가 왕의 물건을 훔쳤느냐? 우리에게 왕이 특별 선물을 준 것 있느냐?”고 항변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나머지 지파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본문 43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사람이 유다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는 왕에 대하여 십 분을 가졌으니 다윗에게 대하여 더욱 관계가 있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멸시하여 우리 왕을 모셔오는 일에 먼저 우리와 의논하지 아니하였느냐?”

당시 이스라엘 12지파는 은근히 두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한 그룹은 유다와 시므온 지파 2개 지파로 이루어진 그룹이고, 또 한 그룹은 나머지 10개 지파로 이루어진 그룹입니다. 10개 지파가 모여 십 분을 가진 이스라엘 사람들이 더 다윗 왕과 관계가 깊은데 왜 너희가 왕을 모셔오는 일에 우리와 의논도 하지 않았느냐?”고 해서 논쟁이 일어났는데 결국 그 논쟁에서 유다 사람들이 더 강경한 발언을 했습니다.

왜 이런 갈등이 있게 되었습니까? 유다 지파의 약삭빠른 태도도 원인이 있었지만 보다 근원적인 원인은 인간의 질투심때문입니다. 결국 시기와 질투로 이스라엘 공동체는 큰 갈등을 빚게 되고 나중에 나라가 남북으로 갈리게 됩니다.

가장 파멸적인 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질투입니다. 성경을 보면 질투로 인해 파멸에 이르게 된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사울이 초기에 얼마나 훌륭한 인재였는지 모릅니다. 외모, 교양, 인덕, 태도, 통솔력, 겸손함 등 정말 나무랄 데 없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질투하면서 점차 저주받은 인생이 됩니다. 그처럼 질투가 무서운 죄이고 치명적인 죄입니다. 사람이 질투에 빠지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시야가 좁아지게 됩니다.

사람이 질투에 빠지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 판단, 자기 기분을 믿고 그렇다고 단정해 버립니다. 남편이 며칠 간 늦게 들어와도 내 육감은 못 속여!” 하면서 자기 육감을 믿습니다. 분명히 어떤 사실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질투에 빠지면 그렇다고 여겨버립니다.

 

자기의 가능성이 점차 제한됩니다.

사울은 질투에 빠지면서 점차 영민한 판단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처음에 그가 가진 놀라운 덕목들이 더 이상 계발되지 못합니다. 사람이 질투에 빠지면 자신의 가능성이 점차 위축됩니다.

 

일상적인 삶이 철저히 파괴됩니다.

질투는 엄청난 감정 에너지를 동반합니다. 그래서 질투하면 얼굴색이 변하게 되고 자기도 억제하지 못하고 주야로 질투의 대상만 묵상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묵상하고 성경을 묵상해야 하는데 질투의 대상을 묵상하니 건강한 삶이 이루어질 수 없고 자기의 삶과 자기의 책무에 대한 감각이 무뎌집니다.

 

공동체에 큰 해를 끼치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일어나는 상당히 많은 갈등이 어디에서 비롯될까요? 정직하게 말하면 상당히 많은 경우가 질투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좋은 일을 당하면 오히려 눈치보고 말을 조심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금실 좋은 부부가 교회에 와서는 본 척 만 척 합니다. 그처럼 질투는 거룩한 공동체를 아주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 됩니다.

 

결국 자기 자신이 망하게 됩니다.

다윗을 질투했던 사울이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모든 지혜와 판단력을 잃어버리고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비엔나의 궁중 악사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정말 훌륭한 음악가인데 어느 날 그가 젊은 음악가 모차르트를 발견하고 엄청난 질투에 빠져 나중에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미치광이가 됩니다. 그처럼 질투의 화살은 결국 자기에게 돌아와 자기를 죽입니다. 어떻게 질투를 극복하고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요?

 

< 질투를 극복하는 방법 >

첫째, 주님께 우리의 시선을 집중해야 합니다. 질투는 질투하는 대상에게 집중해서 생기는 마음의 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집중하면 그 질투는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특별히 미워해서 덜 주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지금은 비록 가진 것이 부족해도 우리는 주님의 기쁨인 줄 알아야 합니다.

둘째, 믿음 안에서 자신의 인생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내가 가진 것은 기억하고 가지지 못한 것은 잊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장 적절한 것을 주셨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 것만 가지고 계발해도 충분히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셋째, 믿음을 가지고 넉넉한 마음으로 이웃을 축복하며 살아야 합니다. 살리에르는 모차르트를 질투하다가 망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차르트도 훌륭한 후배를 발견합니다. 바로 베토벤입니다. 그때 모차르트는 베토벤을 보고 결코 질투하지 않고 여기에 놀라운 후배가 등장했습니다.”고 하며 베토벤을 키워줍니다. 결국 모차르트도 쓰임을 받고 베토벤도 쓰임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너그럽게 세워 주는 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러면 상대방도 살고 나도 사는 역사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모두 그리스도와 같이 오늘도 사람을 세워주고 축복을 주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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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UNHANBU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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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부자의 성경공부 2017. 10. 13. 17:39

다윗 왕의 군사들과 다윗을 반역한 아들 압살롬의 군사들 사이에 벌어진 에브라임 전투에서 다윗의 군사들이 대승하고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다윗은 듣고 다윗은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으로 기뻐하기보다는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합니다.

그 소식이 들리자  전쟁에서의 승리가 백성들에게 기쁨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슬픔이 되어 승리한 군사들이 개선장군처럼 환영을 받고 입성한 것이 아니라 마치 전쟁에 패배한 사람처럼 조용히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왕이 계속해서 얼굴을 가리고 큰 소리로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고 탄식하자 군대장관 요압이 참다못해서 다윗이 거하는 집에 들어가  말합니다. “왕은 왕의 생명과 왕의 가족의 생명을 구원한 우리 군사들을 그렇게 부끄럽게 하시면 됩니까? 왕의 태도는 압살롬은 살고 우리 모두는 죽었어야 마땅하다는 태도 아닙니까? 이제 나가셔서 왕의 신하들의 마음을 위로하소서!” 그리고 은근히 위협까지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왕의 신하들은 다 떠나고 그러면 왕은 지금까지 당한 어떤 화보다 더 큰 화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말에 다윗 왕이 감정을 추스르고 왕의 직무를 행하기 위해서 성문 앞에 앉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을 보면 저는 훌륭한 지도자에게 있어야 하는 덕목이 무엇인지 몇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1. 감정을 절제하는 태도

다윗은 비록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지만 그 아들이 죽자 슬피 웁니다.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의 반역을 따르는 무리들과 생명을 거는 전쟁을 했던 신하들의 심정을 살펴야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확실히 다윗의 태도는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었습니다.

지도자는 감정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쁜 감정을 지나치게 드러내는 것도 절제하고 슬픈 감정을 지나치게 드러내는 것도 절제해야 합니다. 기쁜 감정을 너무 지나치게 드러내는 것은 가벼워 보이고, 슬픈 감정을 너무 지나치게 드러내는 것은 약해보입니다. 지도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 중의 하나는 안정감입니다. 지도자가 흔들리면 다 흔들리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을 만나도 내적인 평안을 잃지 말고 믿음으로 꿋꿋하게 서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2. 보다 큰 것을 보는 시야

지도자는 혈연만 중시하면 안 됩니다. 때로는 대의를 위하여 혈연과 인정을 버릴 각오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과거의 왕들의 역사를 돌아보면 왕이 된다는 것이 행복한 일만은 아닌 것을 보게 됩니다. 왕비가 된다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남편이 평범한 남자였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남편이 왕이니까 수많은 여인들과 사랑 경쟁을 벌이고 투기하는 불행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평범한 가정의 자녀로 자랐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을 왕자가 되면 언제 신하들에 의해 모함을 받아 죽을지, 같은 형제들의 권력 다툼에 의해 죽을지 정말 위태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왕조 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나라 이씨 조선왕조입니다. 조선왕조는 518년 지속되었는데 물론 518년 이상 지속된 왕조들도 꽤 있습니다. 그러나 이씨라는 한 성씨를 가지고 그토록 오래 지속된 왕조는 세계 역사상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렇게 오래 지속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조선 왕조의 친인척 관리를 철저히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도자는 항상 넓은 시야를 가지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남보다 하나 더 보는 사람을 하나님을 지도자로 삼으실 것입니다.

3. 고난을 극복한 경험

지도자 된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들이 죽고, 신하들은 압박을 합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런 고난의 경험을 통해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고난이 있으면 반드시 그만큼 영광도 주어질 것입니다.

서울 봉천동에 '빈민촌의 슈바이처'라 불리는 한 의사 선생님이 있습니다. 1973년 그분이 서울 흑석동의 한 병원에서 근무할 때, 교통사고를 당한 한 어린이가 택시기사의 손에 들려 왔습니다. 그 아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분은 숨이 멎을 것 같았습니다. 알고 보니 자신의 네 살 된 셋째 딸이었습니다. 손을 덜덜 떨면서 그분은 최선을 다해 딸을 살려보려고 했지만 딸은 곧 숨이 끊어졌습니다.

그 후 1년 동안, 그분은 살 희망을 잃은 폐인처럼 방황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에서 병들어 우는 아이를 발견하고 진찰실로 데려와 가슴에 청진기를 대는 순간, 갑자기 그 아이의 맥박에서 1년 전에 죽은 딸아이에게 청진기를 댔을 때와 똑같은 심장박동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습니다. 그 맥박소리를 들으며 그분은 고백했습니다. “이 애는 내 자녀다. 아니, 세상의 모든 치료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내 자녀다. 이런 깨달음을 주려고 내 아름다운 딸이 먼저 천국에 갔는데 내가 그것을 모르고 방황했구나!”

그날 그분은 딸아이의 죽음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고 사랑과 헌신의 삶을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때부터 의미 없고 슬프게만 보이던 삶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곧 그분은 사명감을 가지고 봉천동 달동네에 병원을 개업하고 천국에 간 딸을 생각하며 수많은 어려운 환자를 무료로 진료해주었고, 결국 봉천동의 슈바이처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고통과 사랑! 감동적인 글과 감동적인 인생을 위해 꼭 필요한 두 가지 주제입니다. 안락함 속의 사랑은 그 빛을 잃지만 고통 중의 사랑은 그 빛을 발합니다. 위대한 사랑은 고통 중에 피어난 사랑입니다. “고통이 무엇인가?”를 아는 자만이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고통의 감수 속에 사랑의 감동이 있고, 고통에 민첩한 자가 사랑에 민첩한 자가 됩니다. 인생의 고통은 인생의 성숙과 아름다움을 위해 꼭 치러야 할 지불금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인생의 모습은 현저히 달라집니다. 생각만 잘하면 의외로 행복은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낮도 필요하지만 밤도 필요합니다. 밤은 때로는 두려운 시간이지만 많은 경우에는 휴식하는 시간입니다. 인생의 밤도 때로는 두렵지만 생각만 달리 하면 그때가 휴식의 때입니다. 실직과 질병은 고통의 밤만은 아닙니다. 그때가 창조적 휴식의 절호의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사람이 밤에 잠을 자지 못하면 헛소리를 합니다. 사흘간만 잠을 안 재우면 도둑질 안한 사람도 했다고 합니다. 밤은 그토록 중요합니다. 밤은 일하지 않기 때문에 비생산적인 때가 아니라 오히려 낮에 일할 수 있는 에너지를 저축하는 때입니다. 인생의 밤도 손해와 불행만은 아닙니다. 밤은 새로운 역사를 위한 밑그림을 그리는 때입니다. 밤을 성숙의 기간, 창조의 시간, 사랑의 공간으로 만드는 위대한 영적 예술가, 굳건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님의 사사기 강해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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