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부자의 성경공부 2017. 10. 18. 11:44

성경에는 다윗 왕정때 헌신한 세 용사가 나옵니다. 다윗 왕정에서 최고서열의 군대장관은 요압과 아마사였고, 일반장군 중에 최고의 첫째 3인은 요셉밧세벳, 엘르아살, 그리고 삼마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30인의 군장들이 있었는데 그 군장들 중에 대표가 둘째 3인인데, 그들은 요압의 동생인 아비새, 브나야, 그리고 익명의 한 군장입니다. 성경에는 그 둘째 3인이 다윗을 위해 헌신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들의 헌신과 충성을 보면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사랑이 무엇일까요? 

1. 깊이 잘 듣는 것 

성경 사무엘서를 보면 다윗이 참 철이 없어 보입니다. 자신의 군대가 산성에 있고, 블레셋 군대가 베들레헴 성에 있어 서로 군사적으로 대치하는데 그때 말합니다. “!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먹고 싶다. 누가 나로 저 물을 마시게 할까?” 베들레헴의 우물물은 다윗이 어렸을 때 자주 마시던 깨끗한 우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시에 어렸을 때의 향수에 젖어서 리더가 그렇게 마음이 약해지면 큰 문제가 됩니다. 

그런 말은 부하들의 가십거리가 될만한 말이었지만 세 용사들은 요새 주군이 이상해졌어!”라고 가십거리로 삼지 않고, 오히려 그 말을 마음속 깊이 들었습니다. 그처럼 말을 깊이 잘 듣는 것이 사랑의 기초입니다. 가끔 예배 후에 어떤 분은 말합니다. “목사님! 말씀 감사합니다.” 그러면 저는 잘 들어준 그분에게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말씀을 잘 전하는 것만큼 말씀을 잘 듣는 것도 훌륭합니다.

말씀을 잘 들으면 일 부탁하기도 편합니다. “집사님! 이것 좀 해주실래요?” 그러면 항상 !” 하고 무조건 대답부터 하고 봅니다. 천사표 교인입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인격과 신앙이 성숙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는 것도 이유가 되지만 가장 큰 이유는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왜 교회를 사랑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깊이 잘 듣는 것은 무엇보다 소중한 사랑의 행위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무서운 일은 말씀에 대한 존경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볼 때 자신이 높은 줄 알면 성경은 침묵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하나님 말씀으로 들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면 그때부터 침묵하던 성경은 말합니다. 그때부터 성경이 하나님 말씀으로 들려지고, 설교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집니다. 그때부터 축복의 역사는 놀랍게 시작됩니다. 

또한 말을 깊이 잘 들으면 이해력이 커집니다. 이해는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고 오해는 사단이 주는 마음입니다. 오늘날 가정이 왜 힘들어집니까? 대개 오해 때문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가사 돌보는 일이 쉽다고 오해해서 나는 밖에서 이 고생을 하는데 집에서 낮잠만 자면서 웬 불평이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사처럼 매일 반복되면서 별로 생색나지 않는 일은 생색나는 일보다 몇 배 힘듭니다.

남편은 기본적으로 아내에 대해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항상 속으로 여보! 이렇게 고생만 시켜서 미안하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반대로 아내도 남편에 대해 내 마음을 너무 몰라줘!”라고 하면서 너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로 자세히 설명해도 이해가 안 되는데 신이 아닌 사람이 어떻게 마음까지 알아줍니까? 

이제 내 마음을 너무 몰라줘!”라고 생각조차 하지 마십시오. 그런 생각을 하면 사단이 슬쩍 찾아와 그 생각을 증폭시키고 은혜와 축복을 짓밟습니다. 물론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것이 속상합니다. 그래도 그때 열심히 기도해서 그런 생각을 물리치고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차라리 내가 그 마음을 조금 더 알아주자!” 그 순간, 사단은 숨이 막혀 도망치고 성령님이 주시는 지극한 위로와 평강이 넘치고 결국 하나님의 축복도 넘치게 됩니다.

성숙한 사람은 어떤 일을 부탁받을 때 “No!"라는 말보다는 “Yes!”라는 말을 할 구실을 많이 찾습니다. 이제 믿음 안에서 “Yes!”라는 말을 잘할 줄 아는 훈련을 하십시오. 무조건 예스!”만 하는 예스맨이 되라는 말이 아니라 예스!”라는 말을 하면서 남을 격려하고 분위기를 띄워주는 예수맨이 되라는 말입니다. 그처럼 남의 처지를 이해해주고, 들어주고, 양보하면서 보다 큰 것을 얻는 삶이 바로 십자가의 삶입니다. 그런 삶을 추구하십시오.


2. 조용히 행동하는 것 

그때 세 용사는 베들레헴 성문 곁의 우물물을 먹고 싶다는 다윗의 말을 듣고 가만히 있지 않고 조용히 물을 구하러 갔습니다. 그들은 있던 아둘람 굴에서 베들레헴까지는 약 50리 정도 됩니다. 왕복 100리 길을 오직 물을 구하려고 적진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처럼 그들은 다윗을 어리석을 정도로 사랑했고 논리를 초월해 충성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조용히 헌신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어느 날, 이사야가 존경했던 웃시야 왕이 죽자 상심한 마음으로 성전을 찾았습니다. 그때 어두운 현실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꼬?” 그때 이사야가 고백했습니다. “하나니!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소서!” 그 고백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에 드셨겠습니까? 가끔 보면 어떤 분은 어려운 일을 앞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제가 그것을 맡겠습니다.” 그런 분들 보면 너무 기쁘고 마음에 흥분과 감동이 생깁니다. 그처럼 조용한 헌신은 영혼의 목마름을 해소하는 최대 청량제입니다.

왜 그때 세 용사가 다윗에게 물을 구하러 다녀오겠습니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다윗이 그 우물물을 먹고 싶어도 갖다오라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조용히 행동한 것입니다. 그처럼 조용히 행동할 때 더욱 감격이 됩니다. 어떤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가 못하면 무책임한 사람이 되지만 세 용사처럼 말을 안 해도 리더의 마음을 읽고 어느새 리더가 원하는 일을 해버리면 감동이 배가됩니다.

말을 잘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칭찬하는 말과 분위기를 밝게 하는 말을 많이 해주고, 꿈과 비전을 격려하고 믿음을 선포하는 말도 많이 해주십시오. 그러나 때로는 말없이 음지에서 봉사하는 시간도 많이 가지십시오. 특히 중요한 전략과 꿈과 비전을 이루는데 필요한 구체적인 정보들은 너무 쉽게 발설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사단이 끼어들어 그 말과 정보를 왜곡해서 비전을 방해합니다. 살다 보면 그런 일을 얼마나 많이 겪습니까? 그래서 인사 문제는 발표 전까지 그 내용을 극비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입니다. 믿음의 길에서 이탈하지만 않으면 하나님은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적합한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그러므로 너무 하나님의 때에 앞서서 말이 먼저 나가게 하지 마십시오. 물론 칭찬하고 격려하고 사랑하는 말은 많이 해주십시오. 그러나 고급정보와 전략은 비전동역자 외에는 함부로 말해주지 마십시오. 그처럼 찬란한 꿈과 비전을 가지고 나가면서 동시에 말없이 은밀하게 교회를 섬길 때 예수 믿고 인물 되는 역사가 교회와 각 가정에 넘치게 나타날 것입니다.

인생에는 2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참여자의 길이고, 또 하나는 방관자의 길입니다. 참여해야 은혜와 축복을 받습니다. 들러리 인생은 되지 마십시오. ‘주님의 신부신부의 들러리로 전락하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교회를 좌지우지하는 사람이 되지 않아도 교회를 위해 조용히 행동하는 성도는 되십시오. 그래서 교회에서 주인공은 되지 못해도 중심인물이 되기를 힘쓰면 하나님은 반드시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마가복음 10장을 보면 어느 날,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에게 주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하자 나머지 10제자가 분개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주님의 좌우편은 섬기는 자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축복을 원하면 자리에 신경 쓰지 말고 섬김에 신경 쓰라는 것입니다. 주님도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려고 이 땅에 오셨다고 했습니다(10:45). 결국 주님 닮은 모습은 교회를 잘 섬길 때 나타납니다. 그처럼 교회를 위한 정성스런 봉사는 이 땅의 축복과 천국의 상급을 저축하는 가장 복된 행위입니다.

3.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

결국 세 용사는 목숨을 걸고 적진으로 들어가 우물물을 길어 와서 다윗에게 드렸습니다. 그때 그 우물물은 물이 아니라 피였습니다. 그들은 가장 소중한 자신들의 피를 드린 것입니다. 그처럼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이 줄 수는 있지만 주는 것이 없이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진실한 관계는 드림과 나눔을 통해 형성됩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소중한 일에 몸과 마음을 드리면 이상하게도 영혼이 살아나고, 건강도 살아나고, 공동체의 사기도 살아납니다.

거목이 쓰러지면 그 쓰러진 거목이 거름이 되어 작은 나무들이 더 많이 생기듯이 교회도 부흥하려면 자신을 거름처럼 드려야 합니다. 취하려는 삶은 영혼의 갈증 나게 만들지만 바치려는 삶은 영혼을 풍성하게 만듭니다. 취하려는 삶은 눈물이 나오게 하지만 바치려는 삶은 노래가 나오게 합니다. 가장 복된 삶은 취하려는 마음보다 바치려는 마음이 큰 삶입니다. 바로 그때 진정한 행복도 찾아옵니다. 

얻음은 행복이지만 드림은 더욱 큰 행복입니다. 시성 타고르는 노래했습니다. “바람이 불어 배 안의 등불이 꺼지니 뱃전에 달빛이 차더라!” 세상 욕심을 버리고 더 많이 나누고 드리면 하나님은 더욱 크고 소중한 것을 채워주십니다. 어떤 분은 드리고는 싶은데 여건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드리고 싶은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은 반드시 드릴 수 있는 능력도 주실 것입니다.

세 명이 용사가 가져다 준 우물물을 받고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그 엄청난 헌신을 보고 다윗은 이기적인 감성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어리석은 육신적인 욕망을 깊이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원했던 소중한 물을 전혀 마시지 않고 그냥 하나님께 부어드렸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이 물은 자신의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갔던 사람들의 피입니다. 저는 도저히 마실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 점이 다윗의 위대한 점입니다. 그는 회개할 줄 알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부하들이 얼마나 감동이 되겠습니까? 부하들은 목숨을 각오한 은밀한 헌신으로 다윗을 감동시켰고, 다윗은 자신의 육신적인 욕망을 과감히 버림으로서 부하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때 그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결국 그 일로 인해 그들은 더욱 비전 안에서 하나가 되었고 결국 나라까지 얻게 된 것입니다

- 이한규목사님 사무엘서 강해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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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UNHANBU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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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부자의 성경공부 2017. 10. 18. 10:00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로마서 31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죄는 우리의 본성 안에 있습니다. 시편 51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누구도 죄에서 면제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남에게 상처를 입고, 남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무엇이 해결책입니까? 

어떤 사람은 상처는 시간이 해결해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목회를 하다 보면 몇 십 년 전의 상처 문제로 여전히 고민하는 사람들을 많이 발견합니다. 처리되지 않은 죄는 시간이 지날수록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악화됩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해결책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를 빌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다윗의 삶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성경에는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후에 그 죄를 감추려고 더욱 큰 죄를 저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윗이 약 50세쯤 되어 나라에 큰 전쟁이 있을 때, 그는 저녁에 잠이 잘 오지 않아 왕궁 지붕 위를 거닐었습니다. 잠이 오지 않으면 국가적 비상시기에 국사를 살피며 기도했어야 했지만 기도하지 않고 파자마를 입고 왕궁 지붕 위를 거닐다가 그만 밧세바가 목욕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죄는 언제 찾아옵니까? 대개 한가하게 지내고 기도하지 않을 때 옵니다. 독일 격언에는 게으름은 모든 죄의 시초라는 말이 있고, 러시아 격언에는 게으름은 악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일랜드 격언에는 가난은 게으름의 문에서 기다린다.”는 말이 있고, 미국 격언에는 게으른 손은 악마의 일터라는 말이 있습니다. 잠언 1915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해태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휴식과 게으름은 다릅니다. 휴식은 더 열심히 일하기 위해서 잠시 쉬는 것입니다. 휴식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게으름은 유혹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다윗과 밧세바의 범죄는 바로 다윗의 게으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다윗이 왕궁을 거닐다가 밧세바의 목욕하는 장면을 보고 밧세바를 불렀을 때 밧세바는 고민하거나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온갖 애교를 떨었을지 모릅니다. 다윗은 잘생겼고, 나이는 많지만 능력 있는 남자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비밀스럽게 함께 즐겼습니다. 그 비밀스런 관계가 사람을 더 성적인 범죄에 끌리게 만듭니다. 우리만의 비밀이라는 것이 스릴을 주고, 또한 그 관계가 들통 나면 난리가 난다는 사실도 스릴을 주기 때문에 그 관계를 끊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적인 유혹에서는 처음부터 무조건 도망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관계가 완전히 비밀에 붙여질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 생각이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혹시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고,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6:7). 


결국 성경 말씀대로 얘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4절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저가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밧세바는 자기의 매달 주기가 막 끝났기에 임신 기간이 아닌 줄 알고 다윗과 동침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만 임신이 되어버렸습니다. 

약 한 달 후에 밧세바는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고 다윗에게 그 소식을 알렸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다윗이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죄는 항상 가격표가 있습니다(Sin always has a price tag). 그 가격표는 항상 비쌉니다. 그 중에서 성적인 범죄의 가격표는 가장 비싸서 항상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합니다.

그 상황에서 다윗은 철저히 회개했어야 했습니다. 죄와 잘못을 고백하면 부끄럽게 될 수 있고, 행동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고 벌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 고백으로 죄의 사슬은 끊어집니다. 그러나 죄를 거짓말과 속임수로 감춘다면 훨씬 더 나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안타깝게도 그 사실을 감추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진짜 감출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일을 감추려고 다윗은 한 가지 기발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불러들여 전황과 안부를 물은 뒤 수고했다고 치하하고 집에 가서 발을 씻으라!”고 했습니다(8). 그것은 우리아의 발이 냄새가 났다는 말이 아니라 편히 쉬고 아내와 함께 지내라는 히브리적인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아와 밧세바가 같이 잠자리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9달 만에 아이를 낳는 경우도 많으니까 아무도 그녀의 불륜 사실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밤 다윗은 잠을 잘 잤을 것입니다. 이제 모든 성가신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날 신하로부터 우리아가 집에 가지 않고 다윗의 신하들과 함께 왕궁 문에서 잤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9). 왜 집에서 자지 않았으냐고 다윗이 물으니까 우리아는 큰 전쟁 중에 집에서 자기만 편히 잠을 잘 수 없어서 그랬다고 말했습니다.

그처럼 모델처럼 예쁜 아내가 있는 몇 십 미터 떨어지지 않은 집을 놔두고 왕궁 문에서 잠을 자는 그 충성심을 다윗은 크게 치하해야 했지만 다윗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두 번째 계획을 세웁니다. 그래서 본문 13절 말씀을 보면 우리아를 만찬에 초대해서 그를 칭찬하며 먹고 마시게 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아의 군기를 빠지게 하고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빌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아가 이번만은 집으로 가게 하소서!” 그러나 이번에도 우리아는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 놀라운 충성심에 그는 자신의 죄를 고백했어야 했지만 다윗은 더 파괴적인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비밀 편지와 함께 우리아를 전쟁터로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요압에게 비밀 편지를 보내서 전쟁터에서 우리아를 죽게 만듭니다. 그러자 이제 사건은 종결된 것 같았습니다. 곧 다윗은 편한 마음으로 밧세바와 결혼을 합니다(27). 

당시 다윗 왕이 전쟁 영웅의 과부와 결혼한다는 소식은 큰 뉴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9달이 채 못 되어서 아들을 낳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점에 대해 의문을 가졌겠지만 누가 왕에게 책임을 추궁하겠습니까? 아무도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못해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27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결국 다윗은 그의 명성에 큰 오점을 남기게 되고 그 죄의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이 다윗의 간음사건이 주는 몇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죄는 어느 날 갑자기 짓는 것이 아니라는 교훈입니다. 우리가 짓는 죄를 보면 이미 마음속에 그 죄가 오랫동안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다윗은 성적 욕구로부터 도망치는 법을 훈련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밧세바와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상한 그림으로부터 도망치고, 다른 상대와 부적절한 관계로부터 도망치고, 모든 범죄로부터 도망쳐야 합니다. 

둘째, 죄의 파괴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교훈입니다. 다윗이 일생 동안 쌓았던 명성이 몇 시간의 죄로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보십시오. 몇 시간의 죄는 가볍게 지나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몇 시간의 죄도 무서운 것입니다. 그리고 몇 시간의 죄의 유혹은 누구나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셋째, 죄는 감추면 대개 눈 덩이처럼 불어난다는 교훈입니다. 다윗은 처음에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 간음죄만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 간음죄를 덮기 위해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결국 가장 충성스런 부하와 다른 군사들을 죽였습니다. 죄는 결코 한번 저지르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증식됩니다(Sin multiplies). 그러므로 죄가 아닌 것 같아도 꺼림칙하면 처음부터 멀리하는 것이 좋고, 빨리 그만두는 것이 좋습니다. 

넷째, 죄의 해결방법은 하나님 앞에 자백하는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죄는 감추면 눈 덩이처럼 불어나지만 자백하고 회개하면 누구나 용서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잠언 2813절은 말합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 우리가 용서받지 못할 죄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꾸 죄를 합리화하려고 하지 말고 깨끗이 자백해야 합니다. 

어느 날, 아빠가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알렉스! 잠깐 와봐라! 자동차의 이 부분이 상처 났는데 네가 긁었니?” 아들이 말했습니다. “제가 긁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네가 어제 차를 몰고 갔잖아? 네 동생 모니카가 네가 차를 후진시키다가 우체통과 부딪치는 것을 봤다고 했다.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 그때 아들이 말했습니다. “저는 거짓말을 안했어요. 저는 정말 차를 긁지 않았어요. 우체통이 긁었어요.” 

그런 요상한 언어로 거짓말을 하며 합리화하려는 모습도 있습니다. 그런 말로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합리화하면 하나님이 더욱 괘씸하게 보실 것입니다. 그런 태도는 심판과 진노를 쌓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깨끗이 잘못이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를 입습니다. 

오늘날 죄의 문제에서 완전히 깨끗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죄로부터 자신을 지키겠다는 결심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인 이유는 아무리 큰 죄를 범했다고 해도 진심으로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과거를 깨끗이 씻어주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19절은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과거가 어떻든 상관없이 오늘 이 시간부터 결심하십시오. "하나님! 항상 저의 몸과 영혼이 깨끗하게 하나님 앞에 드려지기를 원합니다. 저의 이 결단을 힘써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그런 결단을 통해서 가정과 교회를 잘 지키고, 주님 만나는 날 정결한 처녀의 모습으로 기쁘게 만날 수 있는 분들이 다 되길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님의 사무엘 강해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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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부자의 성경공부 2017. 10. 17. 16:11

민수기 1426-35절에 나오는 말씀을 통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본문 바로 앞부분에는 12정탐꾼의 보고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고 불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12명의 정탐꾼이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와 모세와 백성 앞에서 보고할 때 어떤 장면이 펼쳐집니까? 30절 말씀을 보면 갈렙은 우리가 그 땅을 능히 취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33절을 보면 다른 정탐꾼들은 우리는 그들에 비하면 메뚜기 같다고 합니다. 즉 오늘날 흔히 말하는 메뚜기 신드롬을 나타냅니다. 그러자 141절을 보면 백성들이 밤새도록 곡을 합니다. 그리고 2절을 보면 그들을 이끈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3절을 보면 하나님까지 원망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하나님은 11절에서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고 합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모세가 19절에서 백성의 죄를 사해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20절에서 하나님은 그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어떤 조치를 취하셨습니까? 25절 말씀을 하반부를 보십시오. “너희는 내일 돌이켜 홍해 길로 하여 광야로 들어갈지니라.”

하나님께서 용서는 하셨지만 무엇인가 새로운 계획을 세우시고 그들을 바로 가나안 땅으로 가게 하지 않고 광야로 들어서게 합니다. 왜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시고, 광야에서 40년의 기간을 지나게 하셨을까요? 첫째 이유는 그들이 원망하고 불평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원망과 불평을 지극히 싫어하시고, 반대로 찬양과 감사를 지극히 기뻐하십니다.

성도는 무엇보다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감사가 없는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입니다. 미국에 가면 영어를 잘 못해도 “Thank you. Excuse me.”란 말만 잘해도 어느 정도 대접을 받습니다. 감사를 잘하는 나라가 선진국이듯이 감사를 잘하는 영혼이 선진 영혼입니다. 지속적으로 감사 훈련을 하십시오. 원망과 불평은 가만히 있어도 잘 자라지만 감사는 아름다운 꽃처럼 계속 정성껏 길러야 감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분복을 감사하며 사십시오. 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 됩니까? 교만하면 감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가 됩니까? 겸손한 사람은 감사를 알기 때문입니다. 이해인 수녀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습니다.

급한 순간에 버스를 놓쳐 안타까울 땐 즉시 다음 버스가 있음을 기뻐한다/ 몸이 아파 괴로울 땐 건강의 고마움을 절감하며 기뻐한다/ 글이 써지지 않아 답답할 땐 내 능력의 한계를 깨치게 됨을 기뻐한다/ 다른 이에게 내 실수가 드러나 부끄러울 땐 겸손을 실습할 기회임을 기뻐한다/ 오해 받아서 슬플 땐 인내할 수 있는 기회임을 기뻐한다/ 이 모든 일들이 신앙 안에서는 더욱 가능한 것임을 기뻐하고 감사한다.”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눈이 있고, 손발이 있고, 걸을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면 감사할 조건의 90% 이상을 가진 셈입니다. 조금 생각만 달리하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시각 장애인은 한번만 보고 다시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감사이고, 은혜입니다. 이제 불평과 원망은 십자가 밑에 묻고 감사하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원망은 광야의 삶을 예비하고, 감사는 광야의 삶을 끝나게 합니다.

 

< 애굽의 사고를 버리십시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로 내몬 이유는 원망과 불평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고 불순종할 때가 다른 때도 많았지만 애굽에서 나올 때에는 특별히 광야로 내몬 이유가 있습니다. 본문 35절을 보면 그 이유는 하나님이 거역한 백성들을 광야에서 소멸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너무 잔인한 것 아닙니까? 어떻게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매정하게 하십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어떻게 하는가?”라고 인간 중심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하는가?”라는 점을 생각하면 사실상 우린 할 말이 없고 그저 하나님의 모든 조치에 아멘!”하고 받아야 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불평하고 원망하는 백성들을 광야에 묻어야만 하는 더 깊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광야에서 세대교체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세대교체를 통해 새로운 사고와 신앙을 심어 줌으로 백성들에게 건강한 민족정신을 주시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오긴 했지만 아직도 그들의 사고는 병든 애굽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처음 애굽으로 들어갈 때 그들은 여호와 중심적 신앙으로 무장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에 있는 동안 그만 신앙이 병든 것입니다. 그런 마음상태와 사고방식으로 가나안 땅에 가면 그냥 망합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살았던 기성세대로는 새로운 역사 창조가 불가능하다고 본 것입니다.

당시 가나안 땅에는 이미 거대한 아낙 자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기보다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어야 하는 땅입니다. 즉 근면하고 건강하고 창조적인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처럼 가나안 땅을 얻으려면 어느 정도의 고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애굽에 있는 동안 그들의 야성은 매우 약해졌습니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하나님 말씀 한 마디만 의지하고 신천지로 떠난 위대한 개척정신을 가진 사람입니다. 또한 야곱은 어떤 사람입니까?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다가 나중에는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입니다. 그처럼 조상들은 삶의 치열한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야성이 넘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에 사는 동안 그들의 마음이 정신이 그 야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개척정신도 없이, 어린아이처럼 투정이나 하고 지냈습니다. 그런 정신을 가지고 가나안 땅에 며칠 안에 들어가면 그 순간은 은혜처럼 보이지만 그 다음에는 가나안 족속에게 다 죽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그들의 근성을 탈색하기 위해서 광야의 기간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한번 굳어진 근성은 변화되기가 힘들고, 변화되어도 적합하지 않은 옛 사고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처럼 애굽에서 길들여진 불신앙와 노예적인 병든 사고를 가진 모습은 도저히 변화되기 어려운 것으로 하나님이 아셨습니다. 그런 모습이 치열한 가나안의 생존의 과정에서는 안 맞는 것이었고, 그렇다고 그들의 변화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어야만 해결된다는 것을 알고 광야에서 세대교체를 하신 것입니다.

 

< 새로운 사고를 가지십시오 >

또한 세대교체를 한 또 하나의 이유는 기성세대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상 광야 세대는 물들지 않은 세대인데 기성세대와 함께 있으면 자꾸만 물이 듭니다. 좋은 것은 늦게 전염이 되지만 안 좋은 것은 너무 쉽게 전염이 됩니다.

젊은 국회의원들이 국회에 들어가면 구세대의 거수기 노릇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처럼 세대교체라는 것이 말이 쉽지 실상을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염성의 뿌리를 차단하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 들이셨고, 그 뿌리를 차단하는 기간이 장장 40년이 걸렸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야의 40년의 세월은 징벌과 심판의 기간만은 아니었습니다. 광야 40년 기간은 새로운 세대를 키워내는 창조적인 기간이었습니다.

광야 세대는 철저한 믿음의 역사를 체험한 세대입니다. 그리고 불평도 있었지만 순종하는 믿음으로 놀라운 은총을 많이 체험했던 세대입니다. 광야기간 중에 하나님은 직접 선생이 되셔서 그들을 키워가셨습니다. 그 기간은 영적 열등생에서 영적 우등생으로 다듬어 가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바로 졸업시험을 치루는 순간입니다.

요즘 젊은 피를 수혈하자는 말이 각 분야에서 돕니다. 세대교체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늙은 피들이 긴장해서 항변합니다. “몸이 젊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젊은 것이 중요하다.” 맞는 말입니다. 세대교체는 연령 교체로 이루어지지 않고 사고 교체로 이루어집니다. 즉 구세대적인 사고가 신세대적인 사고로 바뀌어야 합니다.

믿는 사람에게도 신 사고가 필요합니다. 믿는 사람에게 무엇이 신 사고입니까? 하나님 중심적인 시야를 가지고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을 크게 보고 문제를 적고 보는 사고가 신 사고입니다. 신 사고를 가지고 있을 때 신앙은 건강성을 잃지 않게 됩니다. 신 사고를 가지고 날마다 생동감 있는 신앙을 만들어 승리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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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UNHANBU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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