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부자의 성경공부 2017. 10. 18. 10:00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로마서 31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죄는 우리의 본성 안에 있습니다. 시편 51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누구도 죄에서 면제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남에게 상처를 입고, 남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무엇이 해결책입니까? 

어떤 사람은 상처는 시간이 해결해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목회를 하다 보면 몇 십 년 전의 상처 문제로 여전히 고민하는 사람들을 많이 발견합니다. 처리되지 않은 죄는 시간이 지날수록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악화됩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해결책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를 빌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다윗의 삶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성경에는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후에 그 죄를 감추려고 더욱 큰 죄를 저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윗이 약 50세쯤 되어 나라에 큰 전쟁이 있을 때, 그는 저녁에 잠이 잘 오지 않아 왕궁 지붕 위를 거닐었습니다. 잠이 오지 않으면 국가적 비상시기에 국사를 살피며 기도했어야 했지만 기도하지 않고 파자마를 입고 왕궁 지붕 위를 거닐다가 그만 밧세바가 목욕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죄는 언제 찾아옵니까? 대개 한가하게 지내고 기도하지 않을 때 옵니다. 독일 격언에는 게으름은 모든 죄의 시초라는 말이 있고, 러시아 격언에는 게으름은 악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일랜드 격언에는 가난은 게으름의 문에서 기다린다.”는 말이 있고, 미국 격언에는 게으른 손은 악마의 일터라는 말이 있습니다. 잠언 1915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해태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휴식과 게으름은 다릅니다. 휴식은 더 열심히 일하기 위해서 잠시 쉬는 것입니다. 휴식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게으름은 유혹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다윗과 밧세바의 범죄는 바로 다윗의 게으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다윗이 왕궁을 거닐다가 밧세바의 목욕하는 장면을 보고 밧세바를 불렀을 때 밧세바는 고민하거나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온갖 애교를 떨었을지 모릅니다. 다윗은 잘생겼고, 나이는 많지만 능력 있는 남자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비밀스럽게 함께 즐겼습니다. 그 비밀스런 관계가 사람을 더 성적인 범죄에 끌리게 만듭니다. 우리만의 비밀이라는 것이 스릴을 주고, 또한 그 관계가 들통 나면 난리가 난다는 사실도 스릴을 주기 때문에 그 관계를 끊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적인 유혹에서는 처음부터 무조건 도망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관계가 완전히 비밀에 붙여질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 생각이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혹시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고,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6:7). 


결국 성경 말씀대로 얘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4절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저가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밧세바는 자기의 매달 주기가 막 끝났기에 임신 기간이 아닌 줄 알고 다윗과 동침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만 임신이 되어버렸습니다. 

약 한 달 후에 밧세바는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고 다윗에게 그 소식을 알렸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다윗이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죄는 항상 가격표가 있습니다(Sin always has a price tag). 그 가격표는 항상 비쌉니다. 그 중에서 성적인 범죄의 가격표는 가장 비싸서 항상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합니다.

그 상황에서 다윗은 철저히 회개했어야 했습니다. 죄와 잘못을 고백하면 부끄럽게 될 수 있고, 행동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고 벌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 고백으로 죄의 사슬은 끊어집니다. 그러나 죄를 거짓말과 속임수로 감춘다면 훨씬 더 나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안타깝게도 그 사실을 감추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진짜 감출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일을 감추려고 다윗은 한 가지 기발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불러들여 전황과 안부를 물은 뒤 수고했다고 치하하고 집에 가서 발을 씻으라!”고 했습니다(8). 그것은 우리아의 발이 냄새가 났다는 말이 아니라 편히 쉬고 아내와 함께 지내라는 히브리적인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아와 밧세바가 같이 잠자리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9달 만에 아이를 낳는 경우도 많으니까 아무도 그녀의 불륜 사실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밤 다윗은 잠을 잘 잤을 것입니다. 이제 모든 성가신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날 신하로부터 우리아가 집에 가지 않고 다윗의 신하들과 함께 왕궁 문에서 잤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9). 왜 집에서 자지 않았으냐고 다윗이 물으니까 우리아는 큰 전쟁 중에 집에서 자기만 편히 잠을 잘 수 없어서 그랬다고 말했습니다.

그처럼 모델처럼 예쁜 아내가 있는 몇 십 미터 떨어지지 않은 집을 놔두고 왕궁 문에서 잠을 자는 그 충성심을 다윗은 크게 치하해야 했지만 다윗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두 번째 계획을 세웁니다. 그래서 본문 13절 말씀을 보면 우리아를 만찬에 초대해서 그를 칭찬하며 먹고 마시게 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아의 군기를 빠지게 하고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빌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아가 이번만은 집으로 가게 하소서!” 그러나 이번에도 우리아는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 놀라운 충성심에 그는 자신의 죄를 고백했어야 했지만 다윗은 더 파괴적인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비밀 편지와 함께 우리아를 전쟁터로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요압에게 비밀 편지를 보내서 전쟁터에서 우리아를 죽게 만듭니다. 그러자 이제 사건은 종결된 것 같았습니다. 곧 다윗은 편한 마음으로 밧세바와 결혼을 합니다(27). 

당시 다윗 왕이 전쟁 영웅의 과부와 결혼한다는 소식은 큰 뉴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9달이 채 못 되어서 아들을 낳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점에 대해 의문을 가졌겠지만 누가 왕에게 책임을 추궁하겠습니까? 아무도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못해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27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결국 다윗은 그의 명성에 큰 오점을 남기게 되고 그 죄의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이 다윗의 간음사건이 주는 몇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죄는 어느 날 갑자기 짓는 것이 아니라는 교훈입니다. 우리가 짓는 죄를 보면 이미 마음속에 그 죄가 오랫동안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다윗은 성적 욕구로부터 도망치는 법을 훈련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밧세바와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상한 그림으로부터 도망치고, 다른 상대와 부적절한 관계로부터 도망치고, 모든 범죄로부터 도망쳐야 합니다. 

둘째, 죄의 파괴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교훈입니다. 다윗이 일생 동안 쌓았던 명성이 몇 시간의 죄로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보십시오. 몇 시간의 죄는 가볍게 지나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몇 시간의 죄도 무서운 것입니다. 그리고 몇 시간의 죄의 유혹은 누구나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셋째, 죄는 감추면 대개 눈 덩이처럼 불어난다는 교훈입니다. 다윗은 처음에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 간음죄만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 간음죄를 덮기 위해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결국 가장 충성스런 부하와 다른 군사들을 죽였습니다. 죄는 결코 한번 저지르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증식됩니다(Sin multiplies). 그러므로 죄가 아닌 것 같아도 꺼림칙하면 처음부터 멀리하는 것이 좋고, 빨리 그만두는 것이 좋습니다. 

넷째, 죄의 해결방법은 하나님 앞에 자백하는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죄는 감추면 눈 덩이처럼 불어나지만 자백하고 회개하면 누구나 용서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잠언 2813절은 말합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 우리가 용서받지 못할 죄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꾸 죄를 합리화하려고 하지 말고 깨끗이 자백해야 합니다. 

어느 날, 아빠가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알렉스! 잠깐 와봐라! 자동차의 이 부분이 상처 났는데 네가 긁었니?” 아들이 말했습니다. “제가 긁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네가 어제 차를 몰고 갔잖아? 네 동생 모니카가 네가 차를 후진시키다가 우체통과 부딪치는 것을 봤다고 했다.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 그때 아들이 말했습니다. “저는 거짓말을 안했어요. 저는 정말 차를 긁지 않았어요. 우체통이 긁었어요.” 

그런 요상한 언어로 거짓말을 하며 합리화하려는 모습도 있습니다. 그런 말로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합리화하면 하나님이 더욱 괘씸하게 보실 것입니다. 그런 태도는 심판과 진노를 쌓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깨끗이 잘못이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를 입습니다. 

오늘날 죄의 문제에서 완전히 깨끗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죄로부터 자신을 지키겠다는 결심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인 이유는 아무리 큰 죄를 범했다고 해도 진심으로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과거를 깨끗이 씻어주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19절은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과거가 어떻든 상관없이 오늘 이 시간부터 결심하십시오. "하나님! 항상 저의 몸과 영혼이 깨끗하게 하나님 앞에 드려지기를 원합니다. 저의 이 결단을 힘써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그런 결단을 통해서 가정과 교회를 잘 지키고, 주님 만나는 날 정결한 처녀의 모습으로 기쁘게 만날 수 있는 분들이 다 되길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님의 사무엘 강해중에서 -

반응형

'선한부자의 성경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도자에게 필요한것 3가지  (0) 2017.10.19
사랑이란  (0) 2017.10.18
새로운 패러다임  (0) 2017.10.17
지혜로운 인간관계  (0) 2017.10.17
복된 성품  (0) 2017.10.16
posted by SUNHANBUJA
:
선한부자의 성경공부 2017. 10. 17. 16:11

민수기 1426-35절에 나오는 말씀을 통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본문 바로 앞부분에는 12정탐꾼의 보고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고 불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12명의 정탐꾼이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와 모세와 백성 앞에서 보고할 때 어떤 장면이 펼쳐집니까? 30절 말씀을 보면 갈렙은 우리가 그 땅을 능히 취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33절을 보면 다른 정탐꾼들은 우리는 그들에 비하면 메뚜기 같다고 합니다. 즉 오늘날 흔히 말하는 메뚜기 신드롬을 나타냅니다. 그러자 141절을 보면 백성들이 밤새도록 곡을 합니다. 그리고 2절을 보면 그들을 이끈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3절을 보면 하나님까지 원망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하나님은 11절에서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고 합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모세가 19절에서 백성의 죄를 사해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20절에서 하나님은 그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어떤 조치를 취하셨습니까? 25절 말씀을 하반부를 보십시오. “너희는 내일 돌이켜 홍해 길로 하여 광야로 들어갈지니라.”

하나님께서 용서는 하셨지만 무엇인가 새로운 계획을 세우시고 그들을 바로 가나안 땅으로 가게 하지 않고 광야로 들어서게 합니다. 왜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시고, 광야에서 40년의 기간을 지나게 하셨을까요? 첫째 이유는 그들이 원망하고 불평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원망과 불평을 지극히 싫어하시고, 반대로 찬양과 감사를 지극히 기뻐하십니다.

성도는 무엇보다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감사가 없는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입니다. 미국에 가면 영어를 잘 못해도 “Thank you. Excuse me.”란 말만 잘해도 어느 정도 대접을 받습니다. 감사를 잘하는 나라가 선진국이듯이 감사를 잘하는 영혼이 선진 영혼입니다. 지속적으로 감사 훈련을 하십시오. 원망과 불평은 가만히 있어도 잘 자라지만 감사는 아름다운 꽃처럼 계속 정성껏 길러야 감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분복을 감사하며 사십시오. 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 됩니까? 교만하면 감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가 됩니까? 겸손한 사람은 감사를 알기 때문입니다. 이해인 수녀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습니다.

급한 순간에 버스를 놓쳐 안타까울 땐 즉시 다음 버스가 있음을 기뻐한다/ 몸이 아파 괴로울 땐 건강의 고마움을 절감하며 기뻐한다/ 글이 써지지 않아 답답할 땐 내 능력의 한계를 깨치게 됨을 기뻐한다/ 다른 이에게 내 실수가 드러나 부끄러울 땐 겸손을 실습할 기회임을 기뻐한다/ 오해 받아서 슬플 땐 인내할 수 있는 기회임을 기뻐한다/ 이 모든 일들이 신앙 안에서는 더욱 가능한 것임을 기뻐하고 감사한다.”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눈이 있고, 손발이 있고, 걸을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면 감사할 조건의 90% 이상을 가진 셈입니다. 조금 생각만 달리하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시각 장애인은 한번만 보고 다시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감사이고, 은혜입니다. 이제 불평과 원망은 십자가 밑에 묻고 감사하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원망은 광야의 삶을 예비하고, 감사는 광야의 삶을 끝나게 합니다.

 

< 애굽의 사고를 버리십시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로 내몬 이유는 원망과 불평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고 불순종할 때가 다른 때도 많았지만 애굽에서 나올 때에는 특별히 광야로 내몬 이유가 있습니다. 본문 35절을 보면 그 이유는 하나님이 거역한 백성들을 광야에서 소멸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너무 잔인한 것 아닙니까? 어떻게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매정하게 하십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어떻게 하는가?”라고 인간 중심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하는가?”라는 점을 생각하면 사실상 우린 할 말이 없고 그저 하나님의 모든 조치에 아멘!”하고 받아야 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불평하고 원망하는 백성들을 광야에 묻어야만 하는 더 깊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광야에서 세대교체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세대교체를 통해 새로운 사고와 신앙을 심어 줌으로 백성들에게 건강한 민족정신을 주시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오긴 했지만 아직도 그들의 사고는 병든 애굽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처음 애굽으로 들어갈 때 그들은 여호와 중심적 신앙으로 무장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에 있는 동안 그만 신앙이 병든 것입니다. 그런 마음상태와 사고방식으로 가나안 땅에 가면 그냥 망합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살았던 기성세대로는 새로운 역사 창조가 불가능하다고 본 것입니다.

당시 가나안 땅에는 이미 거대한 아낙 자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기보다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어야 하는 땅입니다. 즉 근면하고 건강하고 창조적인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처럼 가나안 땅을 얻으려면 어느 정도의 고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애굽에 있는 동안 그들의 야성은 매우 약해졌습니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하나님 말씀 한 마디만 의지하고 신천지로 떠난 위대한 개척정신을 가진 사람입니다. 또한 야곱은 어떤 사람입니까?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다가 나중에는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입니다. 그처럼 조상들은 삶의 치열한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야성이 넘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에 사는 동안 그들의 마음이 정신이 그 야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개척정신도 없이, 어린아이처럼 투정이나 하고 지냈습니다. 그런 정신을 가지고 가나안 땅에 며칠 안에 들어가면 그 순간은 은혜처럼 보이지만 그 다음에는 가나안 족속에게 다 죽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그들의 근성을 탈색하기 위해서 광야의 기간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한번 굳어진 근성은 변화되기가 힘들고, 변화되어도 적합하지 않은 옛 사고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처럼 애굽에서 길들여진 불신앙와 노예적인 병든 사고를 가진 모습은 도저히 변화되기 어려운 것으로 하나님이 아셨습니다. 그런 모습이 치열한 가나안의 생존의 과정에서는 안 맞는 것이었고, 그렇다고 그들의 변화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어야만 해결된다는 것을 알고 광야에서 세대교체를 하신 것입니다.

 

< 새로운 사고를 가지십시오 >

또한 세대교체를 한 또 하나의 이유는 기성세대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상 광야 세대는 물들지 않은 세대인데 기성세대와 함께 있으면 자꾸만 물이 듭니다. 좋은 것은 늦게 전염이 되지만 안 좋은 것은 너무 쉽게 전염이 됩니다.

젊은 국회의원들이 국회에 들어가면 구세대의 거수기 노릇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처럼 세대교체라는 것이 말이 쉽지 실상을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염성의 뿌리를 차단하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 들이셨고, 그 뿌리를 차단하는 기간이 장장 40년이 걸렸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야의 40년의 세월은 징벌과 심판의 기간만은 아니었습니다. 광야 40년 기간은 새로운 세대를 키워내는 창조적인 기간이었습니다.

광야 세대는 철저한 믿음의 역사를 체험한 세대입니다. 그리고 불평도 있었지만 순종하는 믿음으로 놀라운 은총을 많이 체험했던 세대입니다. 광야기간 중에 하나님은 직접 선생이 되셔서 그들을 키워가셨습니다. 그 기간은 영적 열등생에서 영적 우등생으로 다듬어 가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바로 졸업시험을 치루는 순간입니다.

요즘 젊은 피를 수혈하자는 말이 각 분야에서 돕니다. 세대교체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늙은 피들이 긴장해서 항변합니다. “몸이 젊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젊은 것이 중요하다.” 맞는 말입니다. 세대교체는 연령 교체로 이루어지지 않고 사고 교체로 이루어집니다. 즉 구세대적인 사고가 신세대적인 사고로 바뀌어야 합니다.

믿는 사람에게도 신 사고가 필요합니다. 믿는 사람에게 무엇이 신 사고입니까? 하나님 중심적인 시야를 가지고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을 크게 보고 문제를 적고 보는 사고가 신 사고입니다. 신 사고를 가지고 있을 때 신앙은 건강성을 잃지 않게 됩니다. 신 사고를 가지고 날마다 생동감 있는 신앙을 만들어 승리하길 바랍니다.

반응형

'선한부자의 성경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이란  (0) 2017.10.18
죄는 항상 가격표가 있다  (0) 2017.10.18
지혜로운 인간관계  (0) 2017.10.17
복된 성품  (0) 2017.10.16
질투를 극복하는 방법  (0) 2017.10.15
posted by SUNHANBUJA
:
선한부자의 성경공부 2017. 10. 17. 06:29

사무엘하 218-32절에는 아사헬의 죽음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지혜로운 인간관계의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아래 내용은 이한규목사님의 강해 내용입니다)  

사무엘하 처음 부분에는 다윗 진영과 죽은 사울 진영 간의 전투 장면이 나옵니다. 본문 바로 앞에서는 다윗의 군대장관인 요압의 군사들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군대장관인 아브넬 군사들과의 첫 번째 전투장면이 나옵니다. 그 첫 번째 전투에서 요압이 이겼는데, 오늘 본문은 그 전쟁 후에 일어난 일을 묘사하는 장면입니다. 자세한 내용을 살펴볼까요?

본문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곳에 스루야의 세 아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이 있었는데 아사헬의 발은 들 노루 같이 빠르더라.”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에게는 아비새와 아사헬이라는 두 형제가 있었는데, 3형제가 모두 다윗의 용맹한 장군들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아사헬이 가장 발도 빠르고, 가장 날렵했습니다. 

그 아사헬이 전쟁에서 패배해서 도망가는 아브넬을 뒤쫓았습니다. 아브넬은 평소에 아사헬의 명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20절 말씀에서 뒤를 돌아보며 너 아사헬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아사헬이 그렇다고 하니까 본문 21절 말씀을 보면 아브넬이 아사헬에게 네 좌우를 돌아보면 네가 잡을 소년이 많다. 그 중에 하나를 잡고 나를 쫓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사헬은 그 소리를 듣지 않고 계속 아브넬을 쫓았습니다. 

그러나 본문 22절에서 아브넬은 다시 한번 아사헬에게 말합니다. “너는 나를 쫓지 말라. 내가 너를 죽이고 싶지 않다. 너를 죽이면 내가 네 형 요압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그 장면을 보면 평소에 아브넬과 요압이 친분도 있었고, 아브넬이 싸움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도 아사헬이 그 말을 듣지 않으니까 결국 아브넬이 창으로 그의 배를 찔러 죽였습니다. 그러자 뒤쫓아 오던 모든 요압의 군사들이 아사헬이 죽은 곳에 머물러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문 24절 말씀을 보면 아사헬의 죽음을 본 그의 형 요압과 아비새는 계속 아브넬을 뒤쫓아서 기아라는 지역의 맞은편 암마 산까지 이르렀을 때에 해가 졌습니다. 그때 본문 26절 말씀을 보면 아브넬이 작은 산꼭대기에 서서 요압에게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굳이 칼을 계속 휘둘러야 하겠느냐? 그러면 비참한 일만 생긴다. 결국 너와 우리는 형제가 아니냐? 언제쯤 형제 쫓기를 그치라고 명하겠느냐?”


그 말에 요압이 대답합니다. 본문 27절 말씀을 보십시오. “요압이 가로되 하나님이 사시거니와 네가 흔단의 말을 내지 아니하였더면 무리가 아침에 다 돌아갔을 것이요 그 형제를 쫓지 아니하였으리라 하고.” 언뜻 보면 무슨 뜻인지 파악하기 힘듭니다. 여기서 흔단의 말이란 싸움을 끝내는 말을 말합니다. 즉 네가 싸움을 끝내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아침까지 계속 형제를 쫓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한 뒤에 요압은 나팔을 불어 더 이상 아브넬 군사들을 쫓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29절 말씀을 보면 아브넬과 그 군사들이 밤새도록 행군해서 아라바를 지나 요단강을 건너고 다시 비드론 땅을 지나 그들이 임시 수도로 정한 마하나임에 도착했습니다.

그 접전 후에 30절 말씀을 보면 요압이 돌아와서 전과를 살펴보니까 자기 군사들 중에서는 19명과 아사헬, 20명이 죽었고, 아브넬의 군사 중에서는 360명이 죽었습니다. 그 전쟁을 끝내고 요압과 그 군사들이 아사헬은 베들레헴에 있는 그 아비 묘에 장사하고 나서 그들도 밤새 행군해서 자기들이 수도로 정한 헤브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동역의 중요성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스루야의 세 아들은 다윗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맹장들이었습니다. 특히 본문 32절에서 아사헬을 베들레헴에 있는 그 아비 묘에 장사했다는 말씀을 보면 스루야의 세 아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은 다윗과 고향이 같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원장이 자기 동향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명나라를 세웠듯이 다윗에게는 동향 사람들인 이 스루야의 세 아들이 그가 왕이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맹장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보면 그 세 아들인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이 다윗이 왕이 된 후에 있었던 사울의 추종자들과의 첫 번째 싸움에 다 참여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의 용맹으로 그 첫 번째 싸움을 승리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브넬의 군사들이 패퇴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아사헬은 용맹한 것은 좋지만 혼자서 아브넬을 잡겠다는 마음으로 아브넬을 뒤쫓다가 결국 아브넬에 의해 죽게 됩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아무리 용맹한 사람이라도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사회생활을 하고,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아사헬과 같은 사람을 보게 됩니다. 아주 재능이 많습니다. 똑똑합니다. 그런데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공동체의 뜻을 이루는 것도 힘들게 되고, 본인도 결국 비극적인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들 노루처럼 발 빠른 사람이 되는 것도 때로는 필요하겠지만 더욱 필요한 것은 동역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알게 하시고 함께 있게 하신 동역자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 가족만큼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도 이탈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새 권사님들의 건강을 위해서 매일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 권사님들이 한분도 이탈하지 않게 하소서! 작은 힘으로도 멋진 작품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권사님들도 같이 보게 하소서!” 우리는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실질적인 힘을 주려고 지혜를 짜내고 기회를 엿보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를 통해서 반드시 큰 역사를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2. 용서의 중요성 

오늘 본문에서 왜 아사헬은 아브넬을 기를 쓰고 쫓아갔을까요? 아브넬에 대한 미움과 원한 때문이었습니다. 아사헬은 아브넬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상 오늘 본문 22절 말씀을 보면 아브넬은 아사헬과 싸우기를 원하지 않았고, 본문 26절 말씀을 보면 칼은 참혹한 일만 만든다. 우리가 형제끼리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느냐?”고 한 것을 보면 아브넬은 동족끼리 서로 죽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사헬을 미움을 이기지 못하고 이성을 잃고 아브넬을 뒤쫓다가 결국 자기 자신이 죽게 됩니다. 칼은 칼을 부르는 것처럼 미움은 미움을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보면 미움은 미워하는 상대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영혼을 죽입니다.

요나 선지자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니느웨를 미워하고 망하기를 바라서 정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탑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가 탄 배에 풍랑을 만나게 하시고, 물고기 밥이 되게 하셨습니다. 미워하니까 자신이 죽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가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니까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로마서 1219절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스스로 원수를 갚으려고 하면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지만, 하나님의 손에 맡기면 하나님께서 다 멋있게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원수를 갚으려고 하지 말고 용서하려고 해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용서도 없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용서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우리가 진정 축복 받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가 되려면 힘써 용서해야 합니다. 미워하면 내 영혼이 점차 마르게 되지만 용서하면 내 영혼이 점차 풍성하게 됩니다.

미워하는 사람의 마음은 굴뚝과 같습니다. 굴뚝에서 연기가 나가면 옆집도 까맣게 되지만 그 전에 자신의 마음의 연통이 까맣게 됩니다. 그처럼 무슨 억울한 사연이 있든지 상관없이 이웃을 미워하면 내가 먼저 망하게 됩니다.

가끔 우리는 이런 말을 듣습니다. “저 사람은 도저히 희망이 없어!” 그런데 그런 말을 하기 전에 우리는 그 사람의 결점을 덮어주고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사실상 내게도 무수한 결점들이 있습니다. 사람의 결점들은 자동차 헤드라이트와 같아서 남의 자동차 헤드라이트는 내 것보다 훨씬 밝게 보입니다. 그처럼 남의 결점은 내 결점보다 훨씬 커 보입니다. 그 사실을 생각하고 우리는 다른 사람의 결점을 힘써 용납하고 용서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저 사람을 바꿔주세요. 너무 바뀌지 않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 기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용서하지 못한 것을 이 시간 회개합니다. 제가 먼저 변하도록 도와주시고, 용서하는 마음을 주세요.” 그렇게 멋지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고 축복의 문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물론 용서는 쉽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용서하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그래도 그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 십자가를 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도 무엇보다 그 십자가를 잘 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내 생각으로는 도저히 용서하지 못할 일도 하나님께서 힘주시고, 성령 충만을 주시면 용서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크신 용서를 생각하고 용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진심으로 용서하면 신기하게도 우리 주변에 우리를 얽어매던 수많은 사슬들이 신기하게 풀리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2가지 중요성, 동역의 중요성과 용서의 중요성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축복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사람과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항상 겸손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인간관계의 승리자가 되고, 하나님의 축복을 예비하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반응형

'선한부자의 성경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죄는 항상 가격표가 있다  (0) 2017.10.18
새로운 패러다임  (0) 2017.10.17
복된 성품  (0) 2017.10.16
질투를 극복하는 방법  (0) 2017.10.15
지도자에게 필요한 덕목  (0) 2017.10.13
posted by SUNHANBUJA
: